며칠 전 동아의 친구 엄마들과 아주 큰 의견 차이가 있었다. '아이의 미디어 노출을 어디까지 할 것인가.'였다. 내 주변의 엄마들은 아직 아이들은 어리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미디어 노출을 시키면 안 된다고 했다. 실제로, 동아 주변의 친구들은 주말에 ebs 티비를 볼 수 있는 것이 최대의 사치다.
나는 사실 미디어 노출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아이에게는 밥을 먹으라고 하며 유튜브를 쥐어주고, 부모는 누워서 핸드폰을 하는 그런 시간을 하루 종일 갖는다면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네모아저씨의 종이 접는 방법을 찾아보고, 3D 펜 장인 사나고가 어떻게 네모바지 스펀지밥을 만드는지 찾아보는 일이라면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미디어의 검색과 콘텐츠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스스로 좋은 콘텐츠를 검색하고, 활용하고, 중독되지 않게 시간을 제한하는 능력은 본인이 길러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벌써 내 딸은 8살이나 되었다. 게다가 나는 짱구가 재밌는데 왜 보면 안 되냐는 대답에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다. 짱구는 나의 최애 애니메이션이다. 넷플릭스에서 지브리 특선을 보여주던 날 나는 하루 종일 지브리에서 나온 애니메이션을 틀어놨다. 동아가 좋아했던 코코몽, 페어리루, 에그앤젤 코코밍 모두 너무 재밌어서 우리는 늘 함께 봤다.
나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학교가 끝나고 나의 쌍둥이 오빠 종인이와 둘이 만화책방에 가서 닥터노구찌와 미스터 초밥왕을 매일 빌려봤던 그 날들을. 노구찌가 손가락 수술을 받았을 때 그 장면을, 쇼타가 왕초밥을 만들어 팔았던 그 날을, 만화책을 빌리러 가던 그 놀이터 옆 내리막길을, 종인이와 내가 만화책방에 들어가면 VIP가 왔다며 숨겨둔 신작을 선보여주셨던 만화책방 아주머니를, 종인이와 둘이서 소파에 앉아 하루 종일 만화책을 봤던 그 웃음 가득한 날들, 일요일 아침 7시에만 하던 보노보노와 엄마가 사준 핑구 비디오를. 그런 기억들이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해서, 나는 만화 그 자체를 너무나 사랑한다. 첫 직장을 다닐 때, 왕복 4시간이 넘는 회사에서 퇴근하고 돌아오면 '오늘 하루 수고했다'라고 나를 위로해주고 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불 켜진 종인이 방과 종인이가 늘 틀어놓았던 심슨이었다.
책을 탐독하고 깊은 사유를 하는 것이 인생을 풍성하게 하는데 좋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무조건 인생을 행복하게 하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의문점이 든다. 적당히 웃고 즐기는 것이 인생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더욱이 나란 인간 자체가 TV나 유튜브 대신 책을 가까이하는 인간이 아니므로, 아이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 없다. 영화, 드라마, 유튜브, 만화책 같은 것들이 내 인생에 주는 영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내 인생에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내 인생의 문제를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서 찾았지만, 실제로 나를 위로해 주었던 것은 '로맨스는 별책부록'같은 드라마였다.
사실, 난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미디어 노출을 어디까지 허락할 것인가.'가 질문이 될 것이 아니라, '왜 아이가 자꾸 미디어를 찾는가.’가 문제가 되어야 한다. 나의 경험상 8살까지의 아이는 기본적으로 엄마 아빠와의 상호작용을 미디어보다 좋아한다. 엄마랑 아빠랑 같이 놀이터에서 노는 게 더 좋고, 친구를 만나서 흙장난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나이다. 밥 먹을 때 유튜브를 보여달라며 떼쓰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배가 고프지 않거나, 식사시간이 즐겁지 않은 거다. 그토록 식사시간이 즐겁지 않으면, 배가 고플 때까지 기다려주거나 즐거운 분위기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
나아가 이것은 관계의 문제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너는 아이이고, 나는 부모니까 내가 너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극을 통제하는 것이다. 유튜브보다 책이 좋다고 생각하니까, 책을 읽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부모이기 때문에, 내가 먼저 살아봤기 때문에 좋은 것을 말 그대로 내 맘대로 '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좋은 것이면 나부터 해야 한다. 책이 그렇게 좋으면 나부터 읽어야 한다. 공부가 그렇게 좋으면 나부터 해야 한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부모가 책 읽는 모습을 보면, 아이는 자연스레 옆에서 책을 읽고, 부모가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 자식은 자연스럽게 옆에서 종이를 들고 와서 끄적이고 있다. 아이는 내가 꿈꾸는 삶을 살아주는 대리인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 진짜 치사하게 아이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통제하고 아득바득시키지 말자. 잠든 아이 옆에서 새벽 두 시까지 핸드폰을 부여잡고 눈이 빠질 때까지 남의 인스타그램을 뒤지면서, 아이들에게 공부해라 책 읽어라 하지 말자. 나 티비 볼 때 좀 보여주고, 나 유튜브 보면 옆에서 내가 고른 괜찮은 애니메이션 좀 보여주고, 억지로 먹이고 씻기고 재우지 말고, 함께 적당히 즐겁게 잘 살 수 있는 궁리를 해보자. 아이는 내가 낳았다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의 대리인은 더더욱 아니다. 아이는 태어난 후부터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고 살아가야 하는 하나의 인격체이며 완성된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