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음 소희'를 보고
내 사업을 함에도 불구하고, 가끔 진짜 진짜 일하기 싫은 날이 있다.
오늘이 나에겐 그런 날이었다.
마치 수능 수험생이 하루라도 공부를 안 하면 진도가 밀리니 독서실에 꾸역꾸역 들어가는 것처럼, 쌓여있는 일이 있으니 오늘은 오후에 출근하기로 했다.
아침에는 뭐 할까 뒹굴거리다가 본 영화가 '다음 소희'였다. 나는 사실 배두나 배우의 담담하고 차가운 말투와 표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게 오히려 빛이 났다. 담담한 표정과 말투 뒤에 너무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는 느낌이랄까.
사무직 경찰 었던 배두나가 형사가 되어, 콜센터에서 감정노동을 하던 실업계 고등학생인 '소희'의 자살사건을 조사하는데 아주 당연한 일들이 당연하지 않게 펼쳐진다. 콜센터의 센터장은 어린 직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회사에 부당함을 호소하다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하지만 회사는 직원을 보호하지 않고, 학교는 학생을 보호하지 않고, 경찰은 시민을 보호하지 않는다. 결국 무력한 소희는 자살을 선택하고, 사무직 경찰이었던 배두나가 보호받아야 할 이 어린 청소년의 죽음을 파해치게 된다.
학교에 찾아간 배두나는 교감과 선생에게 왜 학생을 보호하지 않았냐고 따지자, 교감은 자신은 힘이 없다며 교육청 탓을 했다. 투지에 불탄 배두나는 지방 교육청에 가서 장학사에게 따진다. 왜 그런 감정노동하는 곳에 애를 밀어 넣냐고, 그런데 보내지 않았으면 '소희'가 살 수 있지 않았느냐고. 그랬더니 장학사가 그런다.
내가 뭘 할 수 있냐고. 지금 교육청에서 얘기가 안 통하면 교육부에 갈 거냐고, 그다음에 어딜 찾아갈 것이냐고. 무력하게 자리로 돌아온 배두나는 죽은 소희의 핸드폰에 남겨진 빛나게 웃으며 춤을 추던 소희의 영상을 보며 오열한다.
여러 장면이 나의 상황과 겹쳐졌다.
왜 빨리 연결을 하지 않냐며 상담센터 직원에게 짜증을 내던 나의 모습.
상사의 폭언 때문에 퇴사하겠다던 직원을 보호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
갑자기 잠적해 버린 직원들까지.
특히, 나는 이걸 보고는 MZ 세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책임감이 없는 죽은 세대라며 비난하던 MZ 세대가, 사실은 자신의 인생에 책임감조차 부여되지 않은 슬픈 세대인 것은 아니었나. '이게 다 너를 위한 것'이라며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조차 갖지 못한 아이들이 갑자기 사회에 내보내졌을 때, 무기력한 아이들이 부모 뒤에 숨는 일 말고 어떤 선택지를 가질 수 있을까.
최근에는 한 초등학교 교사가 자살을 했다. 갑질논란이다 공권력의 붕괴다 이야기가 많긴 하지만, 솔직히 옛날의 그 은폐되고 엄폐된 사회에서 갑질이 더 만연했다고 본다. 물론 그 갑질이 소수였고, 휴대폰으로 매일 전화를 하고 폭언을 할 수 없었다는 것뿐이지.
반면에, 내가 학교 다녔을 때는 선생들이 당연스레 촌지를 요구했고, 돈을 주지 않으면 눈에 띄게 아이를 괴롭혔다. 심지어 나는 조회시간에 좀 떠들었다는 이유로 운동장이 떠나가라 선생에게 뺨을 맞아보기도 했다.
나에게는 부모가 선생에게 연락을 할 수 있는 상황, 학생이 선생을 고발할 수 있는 시스템, 적어도 촌지를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하는 문화가 예전보다는 발전된 사회라고 느껴진다.
물론 이번 일을 계기로 교사의 개인 연락처를 공개한다던지, 폭언을 하는 학부모에게서 교사를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정도는 마련이 되겠지.
그러나 그 교사의 일기장에 쓰인 단어, '무력감'.
그게 잊혀지지 않는다.
왜 그 교사는 자신의 엄마 아빠에게 고민을 털어놓지 못했을까.
왜 학교는 교사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을까.
왜 그 아이는 말해보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죽어가고 있던 걸까.
왜 우리는 어른이 되기만 했지, 어른의 역할을 다하지 않을까.
아이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부모에게 달려와 눈물 흘리고 안겨야 한다. 엄마가 걱정할까 봐, 아빠한테 혼날까 봐 나의 고민을 숨길게 아니라 먼저 고민을 털어놓아야 한다. 왜 꽁해있냐고 힘내라고 윽박지를게 아니라, 부모라면 내 아이가 왜 이렇게 힘없나 섬세하게 살피고 안아줘야 한다.
그러나 좋은 부모는 결국 아이가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게 손을 놓아주어야 한다. 자기는 핸드폰 끼고 아이에게 유튜브 그만 보라고 소리 지를게 아니라, 범람하는 쓰레기 같은 유튜브 콘텐츠 중에 좋은 콘텐츠를 선별하고 이용할 수 있게 알려줘야 한다. 공부를 하라고 우르르 대치동에 모두들 이사갈게 아니라,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스스로 계획하고 선택하게 해야 한다. '너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말만 할게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선호가 있는지 스스로 탐험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줘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게임에 빠져볼 수도 있고, 성적이 떨어질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실패의 경험을 해봐야 또다시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 나의 선택으로 결정되지 않은 것들이 많아지면 사람은 당연히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부단히 시도하고 깨지고 실패하고 성공하는 경험들이 쌓여야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싸워 이겨낼 수 있다. 설사 진다 해도, 무력감에 지배당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여유가 생긴다. 그럼 반드시 우리 선배라는 것들은 당연히 쓰레기 같은 부모나 회사가 갑질을 해대면 후배를 보호해줘야 하고, 어른이라는 것들은 먼저 산 사람으로서 남 탓 좀 그만하고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다음 소희'에서 배두나가 죽은 소희의 남자친구에게 찾아가 이야기한다.
"또 욱하면 누구한테든 말해, 나한테라도 말해."
모든 어른은 아이들의 先生이다, 그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