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도 넘은 기억입니다.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서점에 서서 들고 훑어봤습니다. 제 기준엔 현학적 표현과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아 덮고 나온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의 기억 때문일까, 신작 <허송세월>도 서점을 두어 번 드나들고 몇 번을 고민하다, 읽어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여전히 쉽지 않은 표현들이 많았지만, 다행히 읽기 어렵진 않았습니다. 특정 사건들의 숨겨진 스토리를 읽을 때는 몰입도가 매우 높아졌습니다. 늙기, 죽음에 관한 에피소드도 재밌었습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탑 클래스 작가가 되는구나'. 작가의 경험과 지식에 존경심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 에피소드 중 인상 깊었던 내용 하나를 공유하며, 이 책을 마무리합니다.
"황 씨는 교동도의 토박이다. 황 씨의 아버지는 논 8천 평에 일소 서너 마리를 부리는 농부였다. 황 씨는 20대에 몸을 다쳐서 농사일을 이어받을 수가 없었다. 황 씨는 인천에 나가 학원에 다니면서 라디오 수리기술을 배웠다. 황 씨는 진공관 라디오를 배웠는데, 황 씨가 기술을 어느 정도 익히자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나와서 진공관 기술로는 밥벌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황 씨는 인천의 한 시계 수리점에 일꾼으로 들어가서 급료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3년 동안 시계 기술을 배웠다. 잠은 주인집에서 자고 밥은 쌀을 들고 가서 얹혀 먹었다. 황 씨는 스물아홉 살에 고향 교동도로 돌아왔다. 대륭시장 안에 5평 점포를 구입해서 시계 수리점을 열었다. 손님들의 손목시계를 수리했고, 출장 다니면서 벽걸이 시계를 수리했다. 황 씨의 기술은 아날로그 시계를 고치는 기술이었다.
황 씨의 아날로그 시계가 자리를 잡아 가던 1980년대 초반부터 디지털 방식이 시계의 대세를 이루었다. 디지털 시계는 싸고 편리하고, 고장이 나지 않았다. 좀 지나서는 핸드폰마다 시계가 붙게 되어서 아날로그식 손목시계와 벽시계는 빠르게 사라졌다. 황 씨의 가게에는 손님이 없어졌고 생계가 막막했다. 황 씨는 2남 3녀를 기르고 있었다.
1990년대 초 황 씨는 도장 파는 기술을 배워서 도장 일을 겸했다. 황 씨가 도장을 겸업하기 시작하자 이메일을 이용한 전자결재와 육필사인이 결재 행위의 대세를 이루었고, 도장으로 문서를 마무리하는 관행은 차츰 사라졌다. 말년에 황 씨의 가게에는 손님이 하루에 한두 명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