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향 Jul 14. 2024

세입자 주거 리스크 ‘갭투자’

후암동 빌라 사람들-4

새 집을 계약하면서 높은 전세금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계약서 특약에 ‘매수 예정자가 요구할 경우 집 내부를 보여주는 것에 동의하고 필요시 비밀번호를 공유한다.’는 조건이었다.

당황은 했지만 얼떨결에 사인하고 나서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도 더 명확한 의사표시가 필요할 것 같았다.

중개인에게는 컴플레인은 아니지만 중요한 계약 조건에 대해 미리 고지해주지 않은 점을 지적한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집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 기준은 임대인과 직접 의논해서 정하겠다고 알렸다.

우연히 임대인 집으로 차를 한 잔 마시러 갔을 때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집을 보여드리는 데는 동의하지만 서로 일정이 맞지 않는 경우에는 제가 최대한 맞춰보되 비밀번호를 공유하지는 않겠습니다. 불가피한 경우에는 알리고 다시 비번을 변경하겠습니다.”


“네. 계약서의 문구와 관계없이 집을 보여주는 것은 세입자의 의무는 아닙니다. 세입자의 권리니 원하지 않으면 안 보여주셔도 문제 되지 않습니다.”


“아니에요. 집을 보여주는 것에 불편은 없습니다. 계약서의 문구 때문에 제가 조금 오해한 것 같아요.”


이렇게 대화로 잘 마무리가 되었다. 중개인도 그렇게 말했고 경제 뉴스를 봐도 올해 안에 기준금리가 인하될 가능성은 크지 않은 상황이어서 집이 쉽게 팔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갭투자는 전세금과 매매가의 차이가 적으면 수천만 원, 대체로 1억~2억 원 수준인데 갭이 6억~7억 원인 우리 집은 자본력이 꽤 큰 투자자가 뛰어들 수 있는 시장이었다.

하지만 이런 판단에도 생각보다 빨리 집이 팔렸다. 다행히 우리가 사는 호수는 아니었고 바로 위층이다. 집 내부를 보지도 않고 6억~7억 원의 매수대금을 치렀다고 했다.


이사 후에 가족보다 더 가족같이 지내던 임대인 이모와 남편분이 미분양 문제로 얼마나 마음고생을 한지 잘 알고 있어 축하하는 마음도 들었던 게 사실이나, 내심 세입자의 입장에선 주거 리스크가 커진 것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집이 팔린 이유는 다름 아닌 재개발 이슈였다. 며칠 전 오세훈 서울시장의 재개발 정책 중 하나인 신속통합기획 후보 지역으로 내가 사는 동네가 지정됐기 때문이다. 신속통합기획은 지자체가 인·허가를 단축해주고 고도제한 등 규제를 완화해 사업성을 지원하는 제도다.

투자자의 입장에선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지만 문제는 정치 리스크가 있는 제도이고 무엇보다 재개발은 장기 투자와 높은 추가 분담금이 필요한 사업임을 많은 이들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동네 이웃들과 재개발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 보면 추가 분담금에 대해선 자금 계획이 세워져 있지 않았다. 재개발 전문가들이 제시한 추가 분담금은 평균 5억 원 수준이고 고분양가가 예상되는 강남과 용산의 경우 10억 원 규모가 될 전망이다.


재개발·재건축(정비사업)은 낡은 집을 새집으로 바꿔 주민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에서 내 집 마련과 투자 목적의 재테크 기회로 더욱 부상했다. 특히 재개발은 높은 개발이익으로 해당 조합과 지역 주민들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건설업계 수익에도 중요한 경제 이슈가 된다.

인터넷 세상에 투자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에 어떤 정보를 취득하고 버릴 것인지와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투자자의 매우 중요한 능력이다.

투자자들이 더 스마트한 시장 참여자가 되어 재개발 사업이 많은 이들에게 성공 투자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으면 좋은 제도가 되겠지만, 현실은 높은 추가 분담금을 감당하지 못해 분양을 포기하고 외곽으로 밀려난 젠트리피케이션과 자본가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것이 재개발의 한계이다.


며칠 후에 옥상에서 위층 이웃을 만났다.


“임대인도 입주자의 자금 능력이나 소득 등을 심사하겠지만 세입자도 일부는 집주인을 보고 계약을 결정하는 게 사실이잖아요. 저는 이모님이 좋은 분이라는 확신을 가져서 안심하고 계약했는데 입주하자마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저의 임대인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듣곤 솔직히 조금 서운하더라고요. 사는 동안 아무 일이 없이 살다가 퇴거할 수 있기를 바라야죠.“


현행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임대인이 바뀌어도 1회 재계약을 이행해야 하지만, 새 매수인의 직접 거주 등 예외 사유가 인정된다.

실제 지인 중에 임대차법의 임대료 상한을 지키지 않으려고 직접 거주로 위장해 계약을 파기했다가 손해배상을 한 사건이 있었다.

매수인의 기본 정보를 알 경우 이사 후에 전입 세대 열람을 해 직접 거주 여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대차법이 세입자의 주거 안정을 보장하고 개선한 부분은 진일보했지만 계약자 간의 불신과 이익 침해, 그리고 악이용하는 문제는 여전한 법의 허점으로 생각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