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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로하다 May 14. 2020

눈물로 쓴 집필제안서

1인 출판사 사장의 이불킥

몇 년 전, 한 단체와 개인적인 인연을 맺었다. 처음 알게 된 건 그 단체가 주최하고 연예인이 참여한 토론회였는데, 토론회에서 소개한 그 단체의 비전이 마음에 들었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나도 동참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동안 일부러 시간을 내서 행사에 참여하고 친분을 쌓았다.

이왕이면 내 직업인 출판으로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이 단체가 가장 필요한 건 더 많은 사람의 참여와 경제적 지원이었다. 책을 출간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입장으로서도 윈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적당한 시기를 봐서 임원분들을 만나 책 출간을 제안했고, 단체 측에서도 담당자가 정해져서 소통을 이어나갔다. 본격적인 프로젝트 전에 먼저 전자책 출간을 진행했다.

문제는 반응이 좋지 않았다. 이 성적을 근거로 종이책 출간도 제안할 수 있는 건데. 여기서 좀 주눅이 들었다. 구두로 협의한 뒤 본격적인 프로젝트에 대해 기획안을 정리해서 공문을 보내드리겠다고 이야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내가 보여줄 게 하나도 없었다. 경제적 이익은 처음부터 큰 기대가 안 되는 상황에서, 홍보도 딱히 될 게 없었다.


성장 잠재력이 있는 상황에서의 협업이라면 티핑포인트가 될 수 있겠지만, 서로 가진 게 너무 적었다. 예를 들어 대형 유튜버와 신예 유튜버의 협업이라면 대형 유튜버에게는 신선한 소재, 신예 유튜버에게는 시청자 유입이라는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 중급 유튜버 둘의 협업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런데 구독자 2천 명 채널 둘이 만드는 파급력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너무 급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별 소득 없는 일에 몇 개월씩 투자하며 일하자고 말할 수가 있지?’

“그래도 혹시 베스트셀러가 될 수도 있지 않느냐”는 말은 입술에 침을 발라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솔직한 심정을 있는 그대로 썼다. 공문을 보낸다고 말해뒀는데, 적고 나니 편지가 되고 말았다.


“몇 달 전 ○○○ 대표님과 통화해 도서 출간에 대한 제안을 공문으로 정리해 보내드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얼마 동안 연락을 드리지 못한 것은 제가 말한 이 ‘공문’이라는 걸 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출판 시장 상황에서 책을 출간하는 일은 경제적 이익을 위한 사업 계획으로서도, 홍보 효과를 위한 기획으로서도 사실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돈도 홍보도 되지 않는 일을 위해 함께 노력해보자는 제안이 어떻게 당당하게 ‘공문’씩이나 될 수 있을지 저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 말 □□□ 작가님과 함께 작업하면서 제가 본 작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책 출간 작업을 고려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 문서는 공문도, 사업계획서도, 기획제안서도 아닌, 그저 ‘편지’일 뿐입니다.”


구차하기 짝이 없다. 조금만 더하면 울겠다. 쓴 사람이 먼저 부끄러운 글이니, 받은 쪽에서 답장이 없어도 뭐라 할 말이 없다. 그 단체에서는 자체 출판도 고려하는 모양이다. 차라리 그때 개인 봉사자로 참여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다.


십몇 년을 편집자로 살면서 원고청탁은 수없이 해왔다. 원래 편집자는 얼굴에 철판 한두 장쯤 쓰고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 일이 기억에 남는 건 애초부터 잘못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출판사와 저자의 방향이 달랐다. 개인적인 애정으로 이걸 억지로 맞춰보려 했지만, 이성적으로 답이 안 나오니 감정에 호소했다. 자기 자신부터 납득이 안 되니 스스로 부끄러운 거다.     

최선을 다하는 건 기본이다. 긍정은 힘이 된다. 그렇다고 안 되는 걸 된다고 하는 건 사기다. 분수에 맞게 행동하라는 건 너무 자학적이겠으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러니 내가 잘되고 나서 손 내미는 게 가장 속 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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