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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루가 Mar 31. 2016

#5. 여기, 너무 늦게 온 건 아닐까...?

파슈파티나트 화장터 아이들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


2007년 여름, 나와 남편은 파슈파티나트 힌두사원 안에서 생활하는 데이빗, 엘레스, 뿌자 삼 남매를 만났었다. (데이빗과 엘레스는 아버지가 같고 뿌자는 다르다.) 

처음 파슈파티나트 힌두 사원 안의 화장터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전히 카오스 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한쪽에선 시신을 태운 매캐한 연기가 하늘을 향해 오르고 강 맞은편에는 관광객들과 젊은 네팔리(네팔 사람들)들이 여유롭게 데이트를 즐기는... 

그곳에서는 삶과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게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넋을 놓고 바라보는 나에게 남편이 “갠지스 화장터에 비하면 그래도 여기는 정돈이 꽤 잘 되어 있는 편이네”라고 말했다. 

화장을 진행하는 가트 맞은편 계단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염없이 이 낯선 풍경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 그 기묘한 풍경 속을 첨벙거리고 헤엄치며 웃고 떠드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동네 아이들이 더위에 물놀이를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물속에서 동전이나 금붙이를 주워  생활하는 이들의 나름 어엿한 근무시간이었던 것이다. 

바그마띠 강물 위로 시신을 태운 잿가루와 꽃잎을 띄운 디아, 아이들의 맨살이 죽음의 공간에 작지만 생동감 있는 균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꼬리처럼 오빠 손을 꼭 잡고 따라다니는 뿌자라는 어린아이가 눈에 띄었는데 세 아이가 집도 지붕도 없이, 부모의 보호도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곁에서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기록하게 되었다.  남편은 다큐멘터리,나는 사진의 형태로  잠시 그들의 시간을 함께 공유했다. 

곧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지리멸렬한 생활 속에 묻혀 버리고 시간은 더 멀어져만 갔다. 

이후 6년이 지난 2013년 8월의 마지막 날, 나는 꿈에도 그리워하던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촉박하게 서둘러 출발하느라 아이들이 아직 파슈파티나트 사원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곳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그 모든 게 불확실한 상태 속에서 그냥 떠나왔다.

어찌 보면 아이들이 여전히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다면 만나기는 수월하겠지만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그 삶은 또 얼마나 막막하겠나 싶어 마음을 비우고 한 아이씩 찾아 나서기로 했다.


(화장터 연기로 가득한 오후의 파슈파티나트)


 

우기가 거의 끝나가는 시기의 바그머띠 강물은 아이들이 수영하기에 알맞게 불어나 있었고 물살의 흐름도 제법 빨랐다.

비수기라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고 사원 위쪽에서 아래까지 10여 개의 가트(계단이라는 뜻이고 화장터로 사용된다.)주위만 죽은 자와 그를 떠나보내기 위한 가족들로 붐비고 있었다. 

북쪽은 아리아 가트 (Arya Ghat)로 상류계급들의 화장터이고 남쪽은 람 가트 (Ram Ghat)로 낮은 계급의 일반인들의 화장터다.

신분의 차이는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가는 의식에 있어서도 냉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비교적 맑은 강물이 흐르는 상류와는 다르게 화장한 재와 타다만 나무토막, 여러 종류의 오물이 뒤섞인 채 흘러 내려오는 하류의 물살은 결국 같은 방향으로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시신을 태우는 과정 또한 신분과 돈의 역학을 벗어날 수 없어 1kg에 300 루피 하는 나무 장작을 10kg쯤 켜켜이 견고하게 쌓아 올려 버터와 기름도 가득 뿌릴 수 있는 상류층은 주검을 말끔하게 태워 고운 재가되어 강물 위에 뿌려질 수 있다. 하지만 나무와 버터를 여유 있게 살 수 없는, 낮은 계급의 사람은 죽음의 의식에서도 완전히 연소되지 못한 상태로 버려지게 된다.  

화장터를 지나치다 보면 흔히 나무토막 사이로 비어져 나오 노란 발을 보게된다. 

육신만을 남기고 떠나간 이의 죽음의 빛깔...




힌두교 최고의 성지답게 사원 입구에서부터 힌두교 신자가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성(?) 문구가 쓰여 있듯 네팔의 불교나 이슬람교에 비해 가장 종교적 폐쇄성이 강한 곳이기도 하다.

네팔 현지인(네팔리)은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지만 외국인에게는 1000루피라는 어마어마한 입장료를 받으면서 파슈파티나트의 메인 템플인 파슈파트나트 만디르(Pashpathnath Mandir) 사원은 출입금지라니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2007년도엔 250루피였는데 4배의 가격으로 올리면서 통제나 티켓 검사 또한 심해졌다. 

이즈음 사원 입구에서 티켓을 끊지 않고 사이 길로 몰래 들어온 중국인 여행자 한 명은 검문에서 티켓 미소지자로 걸린 데다 비자 만료기간 또한 지나있어 경찰에게 무릎 꿇고 머리를 깎인 채 쫓겨 나는 수모를 겪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사원 군 내부로 들어와 보니 6년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익숙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여전히 강물 위로 기도를 위해 띄우는 디아 꽃잎이 떠내려가고 시신을 태운 잿가루가 뿌려지며 그 사이로 헤엄을 치며 동전을 줍는 아이들이 있다.

매캐한 연기와 날리는 재, 주검이 타들어갈 때 나는 낯선 냄새. 늘 화장터 연기로 뿌옇게 흐리던 기억 속 풍경이 정확히 지금, 같은 풍경으로 펼쳐져 있다.

다른 것은 내가 찾고 있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과 어쩌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나의 마음뿐... 따갑도록 강렬한 햇살 아래 아이들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다행히 6년 전에 만났던, 강물에 떠내려 오는 관이나 장작을 팔아 생활하며 아이들을 챙겨주는 큰 형 노릇을 하던 라스 꾸마르를 강 하류쯤에서 만날 수 있었다. 벌써 부인이 셋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어 곧 세 아이의 아빠가 될 27세의 라스 꾸마르의 얼굴에서 생활에 지쳐 버린 가장의 피곤함이 느껴졌다.

아이들의 행방을 물어보니 엘레스는 여전히 사원 주변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제 이 녀석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우선 아이가 단골로 다니는 로컬 식당에 가서 물어보니 오늘은 안 왔다고 한다.

이곳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온 아이들이라 웬만한 아이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이름만 대면 서로들 다 알기 때문에 물어물어 갈만한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뜨거운 햇빛속을 헤매기를 서 너 시간...

엘레스를 잘 알고 있다는 친구 아이가 게임방에 놀러 갔을 거라고 알려 주었다.

사원 밖 도로 건너편 사이버 카페(pc방 같은 곳)를 찾아가 보지만 녀석이 보이질 않는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빈민가 안쪽 길로 들어가 보면 사이버 카페보다 훨씬 저렴한 무허가 게임방이 여럿 있다고 알려 주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헤매고 다니다 네 번째 게임방 안 어둠 속에서 통역을 맡고 있는 덜 구릉이 ‘엘레스!’하고 외치자 구석에서 한 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대낮인데도 무허가 단속을 피해 안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창을 가려 동굴 속처럼 캄캄하다.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나의 눈은 어두운 안개가 가린 듯 아이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저쪽에서는 우리를 알아보았는지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하게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강한 명암의 차이 속에서 이제 와락 껴안기엔 너무 자라 버린 청년에 가까운 엘레스가 내 앞에서 웃고 있다.

길에서 생활하느라 코감기를 달고 살아 늘 코를 훌쩍 거리던 그 아이는 이제 제법 윤곽이 뚜렷한 잘 생긴 네팔 청년으로 자라나 있었다.

이곳에 너무 늦게 온 건 아닐까? 아무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불안한 마음으로 헤매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세 아이중 하나를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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