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니다드, 날것의 운치
고립의 나라인 쿠바에서 눈뜨는 열 며칠의 날들. 손 안의 세상을 만날 수 없는 아침이 이렇게 많은 것들을 멈추게 한다는 사실에 매일 놀란다. 할 수 있는 건 생각하며 기록하거나 멍하니 침묵하거나 내 앞에 난 길을 걸으며 보고 느끼는 것. 살아가면서 꼭 필요하다 생각한 것들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필요치 않다 생각하던 것들은 그 쓸모가 더 짙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 '절대'를 이야기하며 사는 시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들의 고마움은 언제쯤 제대로 기억하며 살 수 있을는지.
본디 있는 제 모습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도시는 예뻤다. 역사의 아픔 가운데 어찌할 수 없는 고립이었으나 오래된 것들이 남아있는 도시의 모습은 상냥했고 삶의 방식은 친절했다. 도시는 그저 세월 따라 낡아졌을 뿐인데 그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오늘날의 쿠바를, 트리니다드를 상징하는 것들이 되었다. 본디 제모 양의 것, 있는 모습 그대로 날 것의 흔적들은 마주하면 늘 숙연해지고 그래서 고맙다. 치장하고 덧입고 가리며 살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날 것의 내 모습이 실패스럽던 날들에도, 그럼에도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가도 괜찮다 말해주어 고맙다. 세월 따라 이 모습 그대로 잘 낡아져서 누군가의 어리석음이 되지 않으면 좋겠다. 내 모습 이대로를 내가 먼저 더 사랑하면서.
2018 12_ 쿠바의 세계문화유산 지정도시 트리나다드 거리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