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지도’ / 다카하시 아유무
약 6년 전, 작은 비영리 문화단체에서 일을 할 때였다. 혈기왕성하게 대학원 수업과 업무를 병행하며 문화기획자가 되려 했다. 막연하지만 몸으로 우선 부딪혀보자 하고 뛰어들었던 현실, 거기엔 커다란 벽이 기다리고 있는 걸 모른 시절이었다. 체계도 없고, 어쭙잖은 권력만 부리는 바닥에서 희망은 보이지 않고 갈수록 지쳐갔다. 우선 그 작은 곳이라도 나와야겠다 싶어 회사에 그만둔다고 얘기를 했다.
나오기 일주일 전쯤? 새로 들어온 오빠 같은 직원 분이 평소에 나를 안쓰럽게 보며 책 선물을 하나 주셨다. 그 책이 바로 ‘인생의 지도’이다. 이 분야에 회의감이 드는 걸 이해하면서도 막상 나간다고 하니 어린애의 선택이 철없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25살이었으니..ㅋ) ‘어딜 가나 다 똑같아~’라는 뉘앙스를 살짝 덧붙이며 주니 아이러니했다.
계속 잠자코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내 인생인데..?!
난 그곳을 나오고 이곳저곳 내가 선택한 곳들을 거쳐 지금 회사에 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분야도 바뀌었고 하는 일도 달라졌지만 굉장히 만족스럽다. 왜냐하면 스물다섯 살, 그땐 상상할 수 없었던 상식적인 환경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만든 길이다. 아직도 온전히 만족스럽지 않지만 발버둥 치면 가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아무튼 이 책은 처음 받을 때 주신 분의 의도(?)와는 달라졌지만 앞으로 내 인생을 그리는데 기분 좋은 책 한 권이 되었다.
사실 이 책은 엄청나게 기억에 남은 책은 아니다. 그런데 딱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는데 고등학교 때 인상 깊게 읽은 ‘LOVE&FREE’가 떠올랐고 혹시나가 역시나! 이 책 작가가 동일한 작가였다.
'LOVE&FREE'를 처음 읽었을 때, 꿈 많은 고등학생이었어서 전율을 느끼며 읽었었다. 이 책은 사진 에세이였고 전 세계 곳곳의 모습이 영감을 주는 글귀와 함께 담겨 있었다.
'인생의 지도' 역시 비슷한 콘셉트로 수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다녀온 작가의 또 다른 사진 에세이였다. 이제 어릴 적처럼 세상 신기하게 감동받진 않지만 ‘자신을 알자’라는 주제에 맞게 20대 중반인 나에게 인생선배처럼 친절한 책이었다.
저자는 전 세계를 여행 다니며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벌이는 자유인이다. 결혼을 한 후, 3일 만에 아내와 둘이서 세계일주에 나서며 2년 동안 남극은 물론 북극까지 곳곳을 돌아다니고 온 여행가다. 거기서 찍은 사진과 글귀들은 일상에만 고정된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아무리 감동적이고 따라 하고 싶다 해도 우리 모두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외국으로 나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을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가진 게 없던 그땐 더 그랬다. 그냥 여행은 도전이고, 도전은 탈출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동하는 것과 나 자신에 집중하는 게 여행의 목적이라 여기며 책을 읽었다.
35page /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고? 아무리 심각하게 고민해봤자 그런 건 한평생 알지 못할 거야. 일단 마음껏 오감을 열고 '뭐든 해보자!'하는 정신으로 호기심에 몸을 맡기고 지구상을 돌아다녀 보자. 하고 싶은 것은 머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거야.
65page / 먼저 하고 싶은 것에 마음껏 열중하는 거야. 모든 것은 거기에서 시작돼.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좀처럼 잘하기 어렵지만 하고 싶은 일은 확실히 잘할 수 있어.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아 지혜와 기술을 몸에 차곡차곡 모으는 거야.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때 자연스럽게 돈이 따라오게 돼. "어른이 진지하게 계속 놀이하면 그것이 기업이 된다."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결국 내 이야기다. 여행가나 모험가는 아니어도 내 인생이니까 내가 지도를 그려야 한다. 지도를 그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건 짧은 여행이라도 조금씩 하며 스케치를 하는 것이었다.
거창한 여행이 아니더라도
가던 길과 다른 길도 가보고,
집 주변 몰랐던 장소도 가보는 여행을 하며
낯선 환경을 일부러 만들어 보았다.
‘인생의 지도’를 읽기 훨씬 전부터 이미 나는 그러고 있었단 걸 알았다. 필름 카메라인 니콘 FE2로 빨빨 돌아다니며 찍던 사진들이다. 별 거 아닌 풍경들이 지금 돌이켜보면 제법 재밌다. 명소가 아니기도 하고 특별히 다시 갈 일이 없던 곳들이라 다시 봐도 새로워서이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다니던 곳에서 조금 벗어난 곳들이었다. 카메라와 낡은 싸이언폰 하나만 들고 다니면 모든 피사체가 특별해 보였다. 그래서 누구보다 좋은 여행 친구, 사진이란 매체를 알게 되었다.
처음 사진을 배울 때는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소위 말하는 나 때만 해도(07학번)) 딱딱한 다큐멘터리 사진이 옳다고 여긴 동아리에 가입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당시에 직접 현상하고 인화할 수 있는 암실이 있었고, 한참 동아리 활동하던 1학년 때는 '이게 진. 짜. 사진이구나~'하고 암실의 매력에 푹 빠져 지냈다.
필름을 세심하게 현상하고 빨간 조명 아래에서 내 사진을 바라볼 때 그 기분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벅찬 보람이 느껴졌다.
인화지에 쪼이는 빛에 따라 다르게 인화되는 모습. 이런 과정 하나하나에 몰입하다 보면 너무 재밌어서 밥 먹는 시간이 된 줄도 몰랐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 인화지에 상이 떠오르는 걸 보는 게 더 좋았던 때다.
마지막으로 뽀독뽀독 소리 내며 인화지를 씻고 창문에 붙여 말리면 날씨 좋은 날 빨래를 말리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사진으로 내 '콘텐츠'를
만드는 기쁨을 알게 됐다.
이렇게 기술적으로 사진을 건드리는 것도 재밌었지만, 무엇보다 주제를 배우는 게 흥미로웠다. 40년 넘은 동아리에서 나는 44대였고, 윗 선배들이 Street view를 주제로 (당시엔 요즘처럼 스트리트 포토에 관심 없었지만) 매년 번화가를 흑백 사진으로 찍어 굉장히 재미없고 심심한 사진전을 했다. 그런데도 '흑백 사진이 사진이다' 같은 고리타분한 얘기에 옳다거니 하고 고갤 끄덕이고 있었다.
색깔이 없어서 주제를 드러내기에 더 좋은 흑백사진이었다. 물론 지금 올린 사진들은 많이 미흡한 습작이라 밝기도 엉망진창이다. 그래도 찍을 때마다 내가 무엇을 찍는지를 머리에 그리며 집중하기에 좋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흑백사진이니 뭐니 무슨 유물 같은 얘기에 빠져 살았나~ 싶다가도 그때 배운 사진이 주관에 많은 영향을 미쳐줘서 고마웠다. 색감만 예쁜 사진, 장비만 좋은 사진이 아니고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으니 말이다. 물론 아직도 내 주제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걍 보이는 대로 계속 찍었다.
사진을 찍으면서 ‘인생의 지도’를 기록한다는 걸 느꼈다. 누군가는 일기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데 나는 사진으로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는 순간을 선명히 남길 수 있어 좋았다.
마지막으로 올리는 아래 두 사진은 동아리 때 신인전으로 처음 사진전에 올렸던 사진들이다. 셀렉을 하고 몇 번이고 인화를 다시 하며 올린 최종 사진이다. 우연히 찍은 이 장면들이 콘텐츠를 만드는데 어떤 수고와 인내가 필요한지 가장 먼저 알려준 결과물이다.
내 인생의 지도가 앞으로 어떻게 그려질지 모르겠지만 하나의 지도를 완성하는 마음으로 진득이 무언가를 만들어 가려한다. 다음에 나올 이야기들 역시 주재료로 여행과 사진이 많이 나올 거 같다. 어설프게 시작한 프로젝트지만 실습 겸 실전 겸 더 많은 재료들로 갖은 요리, 즉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어야겠다.
메인 사진 : 카파도키아에서 자화상, 터키 카파도키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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