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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수요자 Oct 14. 2018

'비' 하나로 이 모든 얘기를 할 수 있다니

'비' / 마르탱 파주

'비'를 소재로 펼치는 무궁무진한 이야기

대학교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은 책이 있다. 얇은 두께, 표지에는 심플한 제목 '비'가 적혀있었다. 가볍게 읽기 좋겠다 싶어 아무 생각 없이 빌렸는데 그 안에는 '비' 하나로 놀라운 세상이 펼쳐졌다.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35 page / 비는 어린 시절의 유전자들을 품고 있다. 우리는 호스로 물을 뿌리며 장난을 쳤고, 물웅덩이에서 폴짝폴짝 뛰었고, 신이 나 물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이젠 어른이 된 듯하기 때문에, 우리는 실수를 가장해 도랑에 발을 빠뜨리고는 짜증이 난 것처럼 연기한다. 하지만 실제로 튀는 물에 젖는 것은 우릴 즐겁게 한다. 바지, 양말이야 젖건 말건. 어린 시절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우리는 남몰래 지저분한 개구쟁이로 되돌아가는 것을 자신에게 허락한다.


작가의 말마따나 우리 어린 시절에 꼭 비 속에서 뛰놀았던 기억이 하나쯤 있다. 나는 가장 추억에 남은 것이 초등학교 1,2학년 때쯤이었던 거 같다. 어느 여름날 한참 장마 때였고, 동생이랑 밖에 나갔다가 우산이 뒤집혀 부서져 버렸다. 근데 그냥 그렇게 비를 맞기 시작했고, 정신없이 꺌꺌 뛰놀다 집에 돌아왔다. 할머니는 흠뻑 젖은 우리가 잘 놀아 보였는지 혼내지도 않고, 따뜻한 물을 욕조에 담아 씻겨주셨다. 이런 아련한 추억이 책 읽으며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릴 때뿐만 아니라 작가는 어른이 돼서 맞는 비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87 page / 나는 내 몸에 비의 지문이 찍히는 걸 좋아한다. 그것들은 내 전쟁화들이다. 다른 이들이 루즈 자국이나 금줄을 뽐내듯, 나는 내 셔츠 목깃에 묻은 그것들을 뽐낸다. 내 옷이 그것들을 포로로 붙잡는다. 그 방울들은 보석과 같다. 나는 잠시 내 위에 내려앉은, 손에 잡히지 않는 그 귀한 보석들이  자랑스럽다. 그것들은 금방 하늘로 돌아간다.


나도 살면서 수많은 경우의 비를 봐왔지만 항상 아무 생각 없이 넘겼다. 그런데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일상 속 '비'가 상당히 많은 것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31 page / 비는 잔치를 망친다. 국가적, 국제적, 공적, 사적인 잔치들이 난장판으로 변하고 만다. 결과는 폭탄을 맞은 것보다 더 참담하다. 곤봉과 최루탄도 빗방울의 군중을 해산시킬 수는 없다. 무정부주의자들과 동맹한 비는 우리의 열정을 울타리 안에 가두는 정부와 기업의 계획들을 무산시킨다. 그것은 음악축제, 불꽃놀이, 혁명 기념일 퍼레이드, 올림픽 대회를 망쳐놓는다. ... 모든 비에는 혁명을 탄생시키는 원리가 녹아있다.


96 page / 비와 음악은 같은 기능을 한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듣지 않을 자유와 들리지 않을 자유를 준다.


83 page / 비는 노벨평화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다.


우리 주변 삶과 사회 전반적으로 비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계속 따라가면 정말 흥미롭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이런 얘기도 한다.


111 page / 이렇게 늘 감정과 결부되어 있던 비가 화학적 면모를 띠기 시작한 건 내가 성인이 되던 시절부터다. 우선 산성비가 그랬고, 이어 황사비가 그랬다. 그렇게 비는 머리카락을 빠지게 하고 중금속에 오염시키는 천덕꾸러기로 서서히 변해갔다. 그 시절부터 사람들은 “이놈의 비”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장년, 사람들은 그 ‘너그러운 괴물’이 ‘위협적이고 흉포한 괴물’(슈퍼 태풍)로 변할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번 물어보자. 이 모든 게 과연 비의 잘못인가?


비 얘기가 아름답기만 해서 과연 부정적인 얘긴 없을까 했는데.. 역시 있었다. 내 주변에만 해도 비를 특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비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인간이 유발한 환경오염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며 현대인이 자연에 대하는 태도를 짚어준다.



이게 참,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세세한 내용이 모두 기억나진 않지만 이 책 특유의 느낌은 뚜렷하게 마음에 남았다. 비 하나 갖고 이렇게 가지각색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신기했고, 작가가 바라보는 시선이 팩트체크 같다가 어쩔 때는 감성 한 가득 묻어나왔다. 온라인 서점에서 보니 이 책이 이제 절판된 거 같은데 그래도 여느 도서관에서 뒤져보면 있지 않을까? 마음이 촉촉해지는거 뿐 아니라 색다른 관점을 보여줘서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작가만큼 다양하진 못하지만 내가 찍었던 사진들 중, 기억에 남는 비 사진을 한 번 촤라락 정리해봤다. 세세하게 의미를 짚어주진 못해도 우리나라나 외국에서 찍은 사진, 시기마다 다른 사진이 있어 마르탱 파주가 말하는 것처럼 다양한 비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 날, 대학교 교정에서



인턴했던 박물관 창에 맺힌 빗방울 모양이 예뻐 담았다.



발칸 반도를 달릴 때, 어느 기억 안 나는 지역에서 비가 쏟아졌다.



초원에서 비를 맞던 소



비구름에 세상이 어두 컴컴해졌을 때



맞은 편 차의 눈부신 헤드라이트가 빗물에 가려졌다.



초점이 흐리멍텅해지기 좋은 비오는 창문



비가 다 그치면 햇님이 눈부시게 쨍쨍



하늘에 무지개도 걸쳐지고



천지개벽하듯 구름 사이로 햇살이 쏟아질 때도 있었다.



그렇게 비가 세상을 한바탕 적시고 갔다.



메인 사진 : 비가 그친 블러드 성 인근, 슬로베니아 블러드 성, 2011


*캡처나 출처를 밝힌 경우를 제외한 모든 사진은 본인이 직접 찍었고, 저작권은 본인(@yuoossoo)에게 귀속되어 있습니다. 불펌을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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