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Jul 08. 2022

아기는 업을 거야.

나의 해방 일지에서 나온 이 말의 뜻은.

'나의 해방 일지'라는 드라마를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모든 장면이 아름답고 특히 대사가 좋았다. 그중에서도 계속 떠오르는 말이 있다. 남자 주인공이 떠날 때 여자 주인공이 했던 말이다. 남자 주인공 '구 씨'는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과거 어둠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여자가 자기 때문에 위험해질 수도 있어서다. 이 상황을 모르는 여자는 (아님 눈치챘을 수도) 남자를 붙잡지 않는다. 화가 나지 않느냐는 남자의 물음에 화는 나지 않고 서운하기는 하단다. 남자는 그런 순수함에 화를 낸다. 그러니 그렇게 살지. 하면서 다른 여자들처럼 살라고 말한다. 속물적으로 살면서 온갖 것들을 욕망하고 쟁취하라고. 왜 그렇게 바보같이 촌스럽게 사냐고.그 상징적인 의미로 유모차 끄는 여자들처럼 살라고 한다.


유모차가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

왜 하필 유모차인가. 명품 핸드백을 들고,나 아니면 골프 치러 다니는 여자들이 아니고. 명품 핸드백이나 골프는 일하는 여자들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유모차를 끄는 모습은 주로 전업주부들에게서 나온다. 일하는 여성들은 퇴근해서 부랴부랴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데려오고 저녁밥 짓고 쓰러져 자기 일쑤다.

유모차를 끌고 한가로이 대낮에 공원을 산책할 수 있는 건 남편의 능력 덕분이다. 남편들이 돈을 아주 많이 벌어오거나 유산이 많으면 가능한 일이다.


유모차에는 그들의 '부'가 서려있다. 국산유모차로는 성에 안 차서 유럽에서 천만 원에 수입해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고작 1, 2년 정도 타는데 말이다. 럭셔리한 유모차를 끌고 값비싼 옷을 입은 아기 엄마들의 모습은 남편의 부의 척도다. 그런데 여주인공이 잘라 말한다. 아기는 업을 거라고.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는 것과 등에 업는 것의 차이는 무얼까.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차이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나는 업히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아직도 엄마나 이모들의 등의 감촉, 그 안온한 느낌이 생생히 기억이 난다. 나는 동생들이 셋이나 더 태어날 때까지도 종종 업어달라고 뗴를 썼다.


어른들 등에 업히면 세상 두려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었다. 어른 등은 나에게 바다처럼 넓었다. 딱딱하지만 물렁하기도 하고 따뜻한 촉감이 있었다. 또 얼굴을 가로로 살짝 기대면 등위는 어둡고 포근한 공간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아직까진 부족하다. 포대기가 더해져야한다. 요즘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내가 우리 아이들을 키울 때까지만 해도 주로 포대기로 아이들을 업었다.


요즘은 뒤로 업는 포대기 대신 앞으로 안는 다양한 변형 포대기들이 있다. 뒤로 업는 것과 앞으로 업는 건 그 느낌이 다르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도 앞으로 업는 포대기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뒤로 업는 걸 더 좋아했다. 나도 우량아인 우리 아이들을 뒤로 업는 게 편했다.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아기를 왜 업어 키운다고 했을까. 유모차에 아이를 앉히면 엄마와 스킨십이 없다. 아무리 값비싸고 좋은 유모차라고 해도 말이다. 예전엔 할머니나 엄마가 아이들을 수시로 업어주었다. 아기는 무조건 업는 걸로 알았다. 그래서 그런지 데려와서 키우는 아기에게 '업둥이'라는 말을 썼다. 하지만 요즘 젊은 엄마들은 모유를 먹이면 가슴이 처진다면서 분유를 먹이고, 아기를 업으면 허리가 휜다며 잘 업어주지 않는다.


아기들이 누려야 할 행복을 이래저래 빼앗는 셈이다. 엄마의 젖을 먹고 등에 업혀야 행복한 게 아기들이다.

'해방 일지'에서 지루하지만 평범한 일상을 희구하는 구씨에게 평범성을 사랑하는 한 여자가 한 말이 그것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아주 작고 일상적인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 것이다.

아기는 젖을 먹이고 업어 키우는 원초적인 모성애를 발휘하며 살 것이다.

나는 남자가 나를 떠난다고 울고불고 붙잡는 것이 아니라, 나 홀로도 충분히 잘 사는 걸 보여줄 것이다.

나는 누가 뭐래도 남들에게 보여주는 삶이 아닌,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사람에게 상처받고 힘들어도, 다시금 또 사람과 사람끼리 부딪히는 삶의 한가운데를 살아갈 것이다.


나는 우리 아이 둘을 업어 키웠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다. 사춘기 때나 입시 준비 시절 나를 한없이 힘들게 했지만 지금은 나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두 아이 다 심한 짱구라 유모차 타는 걸 싫어하기도 했지만 업히는 걸 유난히 좋아한 아이들이다.


그리고 해방 일지 여주인공처럼 나도 본능에 따라 사는 종족이다. 내가 주인공이라면 이런 대사를 했을 것 같다.

"아기는 업어 키웠어. 그랬더니 따뜻한 아이들로 자란 것 같아. 물론 나도 업혀서 자랐지. 유모차에 탄 아이들은 더 많은 풍경을 보겠지. 하지만 아기 시절 엄마 등보다 더 좋은 풍경이 있을까. 조금만 지나면 어차피 많은 물건들로 둘러싸이게 될 텐데 말이야. 요즘 정서적으로 힘든 아이들이 많아. 그건 아기일 때 스킨십이 적었던 게 이유가 아닐까? 유모차에 주로 앉아 있었다면 엄마와 스킨십은 적을 수 있지. 긴 인생에서 그 시간은 얼마 안 된다고? 난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두렵고 힘든 시간이 많아. 그때마다 어릴 적 엄마 등에 업히던 행복감이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걸. 굳이 떠올리진 않지만 무의식 속에서 나를 잡아주는 것 같아. 업히는 걸 유난히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려보곤 하지. 그러니까 말이야. 아기는 무조건 업어 키우는 게 좋아."

작가의 이전글 단식원에 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