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 내기에 제법 긴(?) 연차를 내고 뒤늦은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나이 운운하는 것 자체가 나이 든 티를 내는 것 같아서 언급을 지양하고 싶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여독이 풀리지 않는 게 아무래도 나이 탓 같다.
9월 첫째 주 수요일, 출근해서 일을 꼬박하고 밤비행기를 타는 일정.
나의 휴가를 축복이라도 하는 양, 그 어떤 기승전결과 빌드업 없이 버럭 성질부터 내는 진상 고객의 전화를 받았고 공항을 가기도 전에 캐리어 손잡이 하나가 뽑혀 나갔다. (심지어 그 캐리어는 5월에 사서 그날 처음으로 개시하는 캐리어였다) 시작부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일찍이 비행기 표만 질러놓고, 호텔 예약과 동선 짜기를 벼락치기로 겨우겨우 해서 떠난 여행이었다. 파워 J인 내가 여행을 앞두고 온갖 게으름을 떨었던 최초의 여행이라 그런 걸까, 여행 가기 전 한 번도 일어난 적 없었던 일들이 펼쳐졌다.
공항까지 데려다준 동생이 목적지에 도착하면 캐리어가 박살 날 것 같다고 하여 그 찝찝함이 배가 되었다. 실제로 짐을 찾고 보니 캐리어 바퀴 윗부분이 처참하게 깨져 있어 동생의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해외로 몇 년을 날뛰고 다녔어도 캐리어 손상 된 적이 없었는데 이 또한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래도 경유한 비행에서 배달사고 없이 무사히 짐을 받았다는 것에 감사해하며 오슬로 공항을 빠져나와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번 여행의 이유였던 노르웨이의 매력을 파헤치기에 앞서 일단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떠나려고 간단히 짐을 싸서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이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비행기가 최선이었다. 다행히 코펜하겐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코펜하겐 중앙역까지 멀지 않았다.
방문지 위치와 동선 파악이 덜 되어있는 상황에서 중앙역을 등지고선 내 앞에 티볼리공원이 보였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서둘러 호텔 체크인을 마친 뒤 보트를 타기 위해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으로 걸었다. 불과 이틀 전에 찌들 대로 찌든 직장인이었는데 자유로운 여행객이 되어 이국적이고 낯선 거리 풍경을 마주하니 기분이 묘했다. 보트를 타고나서는 일상하고의 격차가 더 크게 벌어졌다. 시차적응도 안 되어 있는데 공간차적응도 안 된 기분이랄까. 눈으로 담았다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가, 핸드폰으로 찍었다가 보트 위에서 나는 몹시도 바빴다. 내 눈과 손만큼 내 귀 역시 분주했다. 보트에서 직원이 나눠준 이어폰으로 오디오 가이드를 들었는데 한국어가 지원되지 않아 영어로 들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설명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서 보트가 데려가주는 경치에 더 집착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름대로 영어 공부를 해온 세월이 있어 조금의 자신감이 있었건만 호주에 이어 덴마크 영어는 내게 친절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많이 실망스러운 한편 배신감도 들었다. 십 대 시절 줄기차게 들었던 덴마크 출신 밴드 Michael Learns To Rock의 노래를 들을 때 나의 영어실력은 거의 동시통역 수준이었는데 말이다. 부족한 영어 실력을 탓하며 그들의 노래를 코펜하겐 여행 내내 들었는데, 내가 좋아했던 그들의 노래가 유독 쉬운 영어로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펜하겐에서 첫날, 첫 투어를 하면서 오해가 풀렸던 건 나의 영어실력만은 아니었다.
코펜하겐의 운하와 해협을 돌 때 소중한 사람들과 금요일 오후를 즐기는 덴마크 현지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기울이고, 수영복 차림으로 수영을 하다가, 햇살 아래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막연하게 덴마크의 휘게 문화를 가족과 함께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밖에 사람들이 많다는 그 자체로 놀라웠다.
나의 이 비좁은 선입견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휘게는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혹은 혼자서 보내는 일상의 소박한 시간, 소소한 즐거움 전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실제 내가 본 그들의 모습에서 여유가 흘러넘쳤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작정을 한 이벤트가 아닌 평범한 일상의 한 단면처럼 자연스러웠다. 질투가 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여 한국으로 돌아와 검색을 해보았다.
작년 10월 주덴마크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올린 덴마크 정세에 한 구절이 확 들어온다. "덴마크의 법정 주간 근로시간은 37시간이지만 실제 평균 근무시간은 주당 33.4시간 정도로 세계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짧은 것으로 조사됨.(OECD 통계)"
이유 없는 현상, 원인 없는 결과란 없는 법이다.
비록 캐리어는 부서졌지만, 평소에 잘 생각지 않았던 나에 대해서, 잘 몰랐던 여행지에 대해서 알아가는 건 여행의 큰 수확이자 기쁨이다. (코펜하겐 여행을 하면서 Jimi Hendrix의 Crosstown Traffic이란 명곡도 알게 되었다)
보트 투어를 마치고 안데르센이 살았다는 뉘하운 거리로 향하며 나는 어쩐지 코펜하겐이란 도시가 좋아질 거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