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이거 없지? 나 이거 있어! 꼬꼬마 시절 한 번쯤 내뱉었거나 들어봤을 법한 유치한 대화를 떠올려본다. 국가 대 국가로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상상하는데, 덴마크가 내게 말을 건다.
우린 안데르센 보유국이야.
말문이 턱 막힌다. 이제 막 시작한 게임에서 싱겁게 져버린 기분이 든다.
동심, 내가 어린아이로서의 마음을 가졌던 그 시절 안데르센 동화에 참 많은 빚을 졌다.
미운 오리 새끼, 벌거벗은 임금님, 성냥팔이 소녀, 엄지 공주, 인어 공주 등등. 이렇게 나열까지 해보니 그의 동화를 좋아해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왕자님과 공주님은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는 해피엔딩이 휘몰아치는 이야기들 속에서 그의 이야기는 동심의 눈에도 인상적인 측면이 많았다. 특히 인어 공주는 (물거품이라는 결말 때문에) 어린 내가 읽었던 최초의 슬픈 동화가 아니었나 싶다.
독기와 계산으로 가득 찼던 어른에서 안데르센의 나라에 온 기념으로 마음 정화를 해보려는 찰나 나보다 앞서 걷던 내 또래 중년(?) 커플이 갑자기 멈춰 서더니 길바닥에서 뜨거운 애정행각을 선보인다. 외로움과 고독함, 못 볼걸 봤다는 억울함이 뒤섞여 깊게 파인 어른의 미간이 심하게 구겨진다.
안데르센의 발자취를 느껴보고자 찾아간 뉘하운 거리는 건물 색이 알록달록하여 동화 같았는데, 음식점과 술집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실제로는 어른의 액티비티가 벌어지는 곳이었다.
잠시 쉬면서 맥주 한잔 할까 고민하다가 아직 갈길이 머니 둘러보는 곳으로 만족하자 하고 막 벗어나려던 순간, 한 동양 여성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내게 사진이 아닌 동영상을 찍어 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당연히 사진일 줄 알고 선뜻 멈춰 섰는데 신박했다. 그녀는 내게 본인의 핸드폰을 쥐어주고는 스스로 선택한 포인트를 왔다 갔다 하며 걷는 척을 했다. 몇 초간 그러고 있는 그 모습이 기이한 동화 속 여주인공 같기도 하고 현실 속 숏폼 중독자 같기도 했다.
누군가의 부탁으로 사진을 찍어줄 때 나는 내가 찍어 준 사진을 확인해 보라 하고 잠시 기다려주는 편인데, 그녀는 그런 나에게 고맙단 말보다 영상이 좀 흔들린 것 같으니 다시 찍어줄 수 있냐는 말을 먼저 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가는 해가 질 때까지 그녀의 개인 찍사가 될 것 같은 기시감에 나는 바쁘단다 하고 웃으며 거절한 뒤 그녀에게서 빛의 속도로 멀어졌다. 똑같은 처지의 여행자끼리 너무 야박하게 굴었나 싶다가도 만만하게 굴면 이용해 먹으려는 것이 다반사인 어른의 세계에서 나는 방심할 수가 없었다. 삼십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억지로라도 동심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이토록 멀고도 험했다.
그리고 몇 걸음 걸어서 나는 또 한 명의 동양 여성을 마주 했다. 그녀는 혼자 서서 셀카로 추억을 남기려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내가 먼저 다가가서 사진 찍어줄까 하고 물어봤다. 그녀는 정말 고마워했고, 성의 있게 찍어준 내 사진에 감탄해 주었다. 사실 나는 (코펜하겐에 도착해서) 호텔 체크인을 할 때 그녀가 내 옆을 지나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혼자 여행 온 동양 여성, 나와 같은 호텔에 묵고 있다는 그 사실하나로 친근감을 느꼈다. 아까 호텔에서 체크인할 때 너를 보았다고 했더니 그녀는 깜짝 놀라며 본인도 오늘 코펜하겐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녀는 일본에서 왔고, 나는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서로에게 알려주었다. 이번엔 그녀가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여 나는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웃으며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 하나로 온기를 채웠듯, 코펜하겐에서 들은 일본 젊은이의 모국어 한 마디로 내 마음 한 구석이 훈훈해졌다. 일상에서는 굉장히 엄청난 것을 원하고 거창한 것을 바라고 살지만 내가 웃고 우는 건 결국 이런 소소함에서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낀다.
뉘하운 거리를 떠나며 안데르센 할배에게 고마움 비슷 무리한 고백을 해봤다.
불혹이 지난 지금 사실상 미운 오리로 판명 난 거 같긴하지만, 할배 덕에 자라는 내내곧 백조가 될 거라는 기분 좋은 착각을 하면서 버틸 수 있었다고. 아니 어쩌면 지금 까지도 그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