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의 혼자 여행, 아무래도 식도락이 없는 여행이 될 것 같아 조식이 포함된 룸을 예약했다.
한 밤 자는 것으로 여행의 반이 지나버린 둘째 날, 아침을 먹으러 호텔 1층으로 내려갔다. 가짓수는 많지 않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소담스러운 조식 뷔페였다. 내가 좋아하는 딘타이펑과 홍루이젠의 나라. 이 사실만으로 대만음식에 대한 마음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재빠르게 음식들을 스캔하고 제일 먼저 접시에 담은 것도 샌드위치와 샤오롱빠오였다. 내 입을 사로잡았던 오리지널에 비할 순 없지만 둘 다 맛있었다. 대만에서 요리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이런 맛을 낼 수 있기에 그런 인기 레스토랑들이 생길 수 있었던 걸까. 타이완 푸드의 저변 파워를 생각하며 대만에서 먹은 음식들 중 불호가 있었던가 돌이켜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한 번 더 담아 온 딤섬을 끝내고 야무지게 과일과 커피까지 챙겨 먹은 뒤 호텔을 나섰다.
애초에 이 날은 일월담에 가려고 했던 날이었지만, 자전거축제 이슈로 데이투어 가이드로부터 취소를 권고받았다. 교통체증과 수많은 인파로 관광이 힘들다는 것이었다. 너무 아쉬웠지만 덕분에 타이중 시에는 다양한 자전거 도로가 있는 구획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일월담 방문이 취소된 순간, 일말의 고민 없이 국립 타이완 미술관으로 향했다. 마침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아 구글 지도를 켜고 걸어서 갔다.
걸으면서 본 아케이드 양식의 상가와 번체자 간판의 상점들로부터 여권에 찍힌 입국확인 도장만큼의 공신력을 얻는다.
Welcome to Taichung.
내가 지금, 여기 타이완에, 진짜 있구나.
따갑고 눈부신 햇빛 때문에 선글라스를 끼긴 했는데 날씨는 그리 덥지 않다. 토요일 오전에는 가만히 있어도 기분이 좋을 판에 날 좋은 날 낯선 풍경의 거리를 걸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타이중은 타이베이, 가오슝에 이어 타이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지만 (인구 밀도가 높지 않은 것인지) 어디를 가도 몸과 마음의 평화가 깨지지 않았다.
20분 정도 걷고 나서 드디어 나의 최애장소인 미술관에 도착했다. 국립 타이완 미술관 건물을 마주한 첫 느낌은 친근하고 편하다였다. 건물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 주말 나들이를 나온 타이중 시민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이 공간의 분위기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타이중 최대 미술관 풍경에 멋을 더했다.
시원스럽게 트인 건물 내부를 가로질러 3층 전시관에서 1시간 넘게 그림을 봤다. 알고 있는 대만 작가는 한 명도 없었지만 한참을 서서 보게 만든 작품 덕분에 몇 명의 화가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참으로 은혜롭게도 국립 타이완 미술관은 입장료가 무료다. 퀄리티 있는 전시를 공짜로 관람하고 나서 나의 럭키드로우는 공항이 아니라 미술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에서 느낀 공감, 그림으로부터 얻은 영감을 가득 안고 미술관 2층의 로즈하우스에 들렸다. 직원에게 로즈티가 마시고 싶어서 왔다고 시그니처 메뉴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스콘을 추가해 로즈티 첫 모금에 베어 먹었는데, 따뜻한 스콘의 고소함과 그보다 더 따뜻한 차의 풍미가 조화로웠다.
(아무도 강요한 적 없음에도) 최근 몇 달간 엄청난 조바심을 부리며 쫓기듯 살고 있었다. 여기에 원플러스원 세트 개념으로 불면증까지 재발해 피로함 또한 누적되어 있었다.
로즈티 매직인 건지 티팟에서 우려진 차를 천천히 따라 마실 때마다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조급함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오랜만에 되찾은 여유도 여유지만, 그림 감상에서부터 차를 마시는 행위로 이어지는 그 느긋한 연속성에 행복해졌다.
회사와 집에서는 내 의식의 흐름대로 뭐 하나를 진득하게 할 수가 없다. 나의 일상은 자의에 의한 정신 분산과 타의에 의한 물리적 방해가 도사리고 있다. 특별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단절이 판을 치는 보통날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것만 연이어서 한 그야말로 스페셜 한나절이었다.
이 행복한 시리즈의 피날레는 미술관 앞의 미술관 길에서 맞기로 하고 초록의 나무들 사이에 섰다.
산책의 BGM으로는 이문세 님의 기억이란 사랑보다를 선곡했다. 2001년 3월에 발매된 앨범의 수록곡이지만 이 노래를 알게 되고 좋아한 건 그보다 한참 뒤였다.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였던 내가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라는 미문에 반응하기엔 그때까지 축적된 인생 경험이 너무도 빈약했다.
언제 어디서 들어도 좋은 명곡에 타이중의 공기와 타이중에서 느낀 행복을 새기며 국립대만 미술관 투어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