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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에 대하여

by 앤디


외국 여행을 할 때 내가 한국 사람임을 드러내는 일은 극히 드물다. 국적을 밝혀야 하는 순간이나 자진해서 말하고 싶은 때가 아니면, 되려 한국인이라는 것이 티 나지 않길 바라는 심리가 있다. 특히 주변에 한국인들이 많거나 여기저기 한국말이 들려오면 이 증세가 유독 더 심해지는 편이다. 익숙함에 신물이 나서 떠난 여행지에서 굳이. 또. 내 나라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지 않달까.




타이중 문화창의산업단지를 한참 둘러보고 나서 대낮에 위스키를 사러 걸어가던 길이었다.


타이중 기차역에 다다를 때쯤 한 쇼핑몰에서 K-POP이 흘러나왔다. 새로움을 찾네 마네 했지만 반가운 마음에 소리의 근원지로 이끌리듯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엔 타이중의 10대 소녀들이 한가득 모여있었다. Five, Four, Three, Two, One 타이머 알림이 끝나면 K-POP이 무작위로 흘러나오고 그 곡의 댄스를 아는 소녀라면 누구든 나와 춤을 췄다. K-POP 랜덤 댄스 챌린지가 이것이로구나. 흥미로운 마음에 잠시 서서 구경을 했다. 아이돌의 음악과 댄스로부터 거리가 있는 40대지만 운이 좋게(?) 몇 곡은 들어본 노래가 나왔다.


소다팝을 알아챈 것은 순전히 8살, 6살 조카들 덕분이었다. 집에 놀러 왔던 조카들의 요청으로 KPop Demon Hunters를 틀어준 적이 있었는데 옆에서 같이 보다 들었던 생각이 났다. 조카들은 그 애니메이션을 무려 22번째 보는 것이라 하면서도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에 my little soda pop 하는 순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구경하는 동안) 가장 많은 소녀들이 우르르 튀어 나와 춤을 춘 곡은 유유유유유유유유 슈퍼 이끌림~의 훅을 가진 노래였다. 심지어 출근길에 많이 들었던 곡이었는데도 제목과 가수가 생각나지 않아 결국 검색해서 알아냈다. 구경꾼임에도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아니었단 서글픔이 밀려와 아일릿의 Magnetic의 댄스 챌린지를 끝으로 쇼핑몰을 빠져나왔다.


10대 시절 나도 pop song을 많이 들었지만 외국의 10대들이 한국의 아이돌 노래와 춤에 열광하는 것을 직접 본 것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K-POP의 어떤 점이 대만의 10대 소녀들에게 가 닿았길래 노래 가사뿐 아니라 안무까지 꿰차고 있는 건지 놀랍고 또 놀라웠다.




다음 날 저녁, 나는 까르푸에 방문하기 위해 이 쇼핑몰에 와야 했다. 랜덤 댄스 챌린지를 보는 동안엔 그곳이 내가 검색했던 타로코몰과 동일한 건물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미리 캡처해 둔 "타이중 까르푸에서 사야 할 쇼핑 리스트"를 들고 마트에 들어섰다. 카트를 끌고 한 층 더 내려가니 초입에 한국말로 "꼭 사야 할 것"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실제 그 zone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쇼핑 아이템들이 쌓여 있었다.


내 취향에 100% 들어맞는 것은 아니더라도 나 역시 한국인의 범주에 속한 사람으로서 그 쇼핑리스트를 따라가면 큰 실패가 없다. 그런데 이번엔 쇼핑의 성패를 운운하기 앞서 구입 자체를 실패한 아이템들이 많았다. 한국인들의 정보력, 구매력을 만만히 보고 저녁 뒤늦게 가서 겪은 참패였다. 신기하게도 한국인 블로거가 추천하는 품목의 매대만 텅텅 비어있는 진광경이 연이어 펼쳐졌다. 똑같은 감자칩이어도 이건 사서 먹어 보세요, 존맛 이렇게 되어 있었던 그 맛만 없었다. 할 수 없이 남아 있는 것들 중에서 대충 골라 들고 계산을 했다. 다음엔 좀 더 일찍 와서 사고 만다 다짐하면서 K-경쟁은 한국을 벗어나도 참 빡세구나를 실감했다.


K-의 여러 분야가 세계시장에서 먹히고 활약하는 것에 가슴이 웅장해지다가도 K-속도와 K-FOMO에는 때때로 숨 막히는 것.


Korean으로서 느끼는 K-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은 타이중에서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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