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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클레어 Oct 17. 2022

10살에 이미 자신에 대한 탐색을 마친 한경기

역사인물 탐구 에세이

향설당 한경기(香雪堂 韓景琦)


서거정이 썼다던 한명회 신도비명 내용을 찾아보려다 아무 생각 없이 한명회 묘지석이라고 잘못 쳤다. 엔터 누르고 나서야 검색창에 뭐라고 입력했는지 깨닫고 "아, 잠깐 내가 치려던 거 저거 아닌...!' 하면서 3초 정도 손이 민망했던 이 실수가 의외로 큰 수확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나는 한경기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한명회 묘지석으로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검색 결과 내 눈에 바로 뜨였던 것은 '9년 전 도굴된 한명회 지석 5억대 밀거래 직전 회수'라는 뉴스 기사였다. '도굴, 한명회 지석, 밀거래, 회수'라는 키워드는 이 검색어를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나도 모르게 클릭하게 만들었다.


조선시대 무덤에는 묘지석을 당연히 같이 묻으니 한명회의 묘에도 지석이 있었을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명회의 졸기에도 그렇고, 신도비명에도 그렇고 한명회가 본인 생전에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업적이 기록되어 있었으니 분명히 무덤까지 모든 내용을 갖고 갔겠지 하는 추측을 했었다. 


'역시나 지석이 있었고, 그런데 그게 도굴되었었고 밀거래될 뻔하다 다행히 회수되었다고?' 한명회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입장이지만 유물의 발견은 언제나 흥미로우니 관심이 생길 수밖에. 무엇보다 나는 '지석이라면 좀 더 한명회 본인의 자세한 입장이 담겨 있겠지. 그렇다면 혹시 무슨 생각에서 별운검을 갑자기 폐하게 만들었는지 그런 것도 적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한명회가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막을 수 있던 까닭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이지 않던가. 이미 관례대로 별운검을 하기로 다 되어 있었는데 그걸 돌연 자신의 입김으로 막는다고? 이것은 한명회가 일찍부터 성삼문을 항상 예의 주시하지 않고 감시하지 않았다면 거사의 움직임을 막기는 어려웠던 일이라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분명 그와 관련해서도 뭔가 묘지석에는 넣어놓지 않았을까 그랬는데.... 는 무슨, 한명회 지석은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운 반전을 보여줬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 회수된 지석들은 앞서 성종 때 만들어진 신도비와는 한명회의 공적에 대한 평가에 있어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석들은 중종 때 묘를 복구하면서 다시 제작된 것으로 특히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킨 행적 등이 내용에서 빠져 있다는 것! 


이 대목에서 나는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다. 예상과 기대가 와장창 무너진다는 기분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단종 복위 운동을 한 인물들에게 정말로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는 의문이 마구 솟아올랐다. 이것은 따로 깊게 조사해볼 필요가 있어졌다. 


연구자들은 지석의 내용에서 한명회가 사육신을 좌절시킨 행적이 빠진 것은 사림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한 중종 대 당시의 미묘한 정치적 상황 변화를 읽을 수 있는 가늠자라고 판단을 했지만 어차피 무덤에 넣는 건데 누가 본다고 미묘한 정치적 상황 변화 때문에 한명회 스스로가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그 행적이 빠진다는 것도 이상하며, 사육신은 무려 200년 지나 숙종 대에나 가서야 겨우 복권되는 데다 아무리 중종 대부터 사림이 정계 진출을 마구 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사림 시대의 시작은 명종 말 선조 대의 일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핵심은 시대의 분위기보다 그리고 죽은 한명회의 입장보다는 이 한명회 묘를 재조성하고 지석을 다시 써넣게 한 개인의 판단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석의 묘지명을 해석한 논문을 통해 지석 마지막 < 제23면 >에 대체 누가 그 묘지명을 써주었는지 확인했다.


공(한명회)의 손자인 경기(景琦)가 나(최숙생崔淑生)와 더불어 교유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그것을 연유로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줄 것을 부탁해 왔다.


그러니까 새로 제작할 묘지명을 한명회의 손자 '한경기'라는 인물이 나라고 지칭한 '최숙생'에게 지어달라고 부탁했다는 건데, 그렇다면 분명 묘지명을 짓기 위한 자료도 한경기가 제공했을 것이고 짓는 과정에서도 논의가 오갔을 거고 묘지명의 모든 내용을 최종적으로 검토한 것도 그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킨 행적'을 빼기를 원했던 것도 한경기가 아니었을까? 나는 생소하고 낯선 '한경기'란 인물이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향설당 한경기. 

아마 역사 교과서에서는 전혀 만나보지 못한 인물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명한 조상 바로 밑에 뛰어난 자손 없다고 우리가 아는 유명 역사 인물들의 바로 아래 자손들이 윗대의 그늘에 가려 그렇게 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손이 현달하려면 다음으로 건너뛰거나 한 몇 대를 건너야 나올까. 


압구정 한명회에게는 9남 7녀의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중 조강지처이자 정실부인이던 황려부부인 여흥민씨에게서 1남 4녀를 두었다. 한명회의 적장자 낭성군 한보의 맏아들이 바로 향설당 한경기이다. 즉 한경기는 한명회의 친손주 중에서도 적장손이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명회가 연산군 대에 부관참시되어 그 묘가 파괴되었고, 중종 대에 다시 복권되어 묘를 재조성해야 했을 때 자손들 중에서도 위치가 있으니 한경기의 역할이 막중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한경기라는 인물은 조사해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충격과 의문점을 안겨주었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치규(稚圭), 호는 향설당(香雪堂). 할아버지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이고, 아버지는 낭성군(琅城君) 한보(韓堡)이며, 어머니는 우참찬 이훈(李塤)의 딸이다.

1489년(성종 20)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대과에 응시하지 않다가, 할아버지 명회가 세조 즉위에 으뜸으로 공을 세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음보(蔭補)로 돈녕부봉사(敦寧府奉事)에 등용되어 그 뒤 돈녕부정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행적을 수치스럽게 여겨 요직을 회피하고 한직에만 머물렀다. 절의로 이름이 높은 남효온(南孝溫)·홍유손(洪裕孫) 등과 어울려 시를 읊었으며,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시로 이름이 높았으며, 저서로 『향설당시집』이 있다. 


한명회의 적장손이 남효온이랑 어울렸었다니, 심지어 남효온이 결성한 자칭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고, 무엇보다도 조부 한명회의 행적을 수치스럽게 여겨 그 덕을 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경기와 남효온의 연결고리를 확인하자 머릿속의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맞춰졌다. 한경기의 절의를 숭상하는 고결한 성품은 그의 묘지명에서도 진실로 잘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몸과 마음가짐의 대개는 군은 품성이 맑고 시원하며 옛사람을 사모하고 선(善)을 좋아하여 미칠 수 없을 듯이 하였다. 배움은 바르고 지식은 명확하였으며 뜻은 높고 아담함을 숭상해 담박하여 한 가지 물건도 그 마음에 연루됨이 없었다. 부(富)와 귀(貴) 보기를 천박하게 여겨 더러운 흙과 같이 생각하였으므로, 속된 자들이 떠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업신여겼으나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 늘 문을 닫고 쓸어 붙이고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 날마다 경서(經書)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평생 뜻이 맞는 사람이 적어 사귀는 바가 매우 적었으나 특히 나와는 좋아하여 만나면 곧 마시고 취하여 종일 말을 나누었다. 기억(記憶)이 해박하고 견해가 순수하며 논의가 뛰어나 후련히 심복(心服)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벼슬을 바깥 사물로 여겨 높고 낮고, 화려하고 썰렁하고, 떠오르고 잠기고, 얻고 잃음을 그대로 맡겨두어 오는 경우 굳이 거절하지 않고 그치는 경우 그대로 받아들일 뿐 초조하게 그 가운데 얽매이지 않고 오직 도의(道義)만을 즐거워하여 생을 마치니, 자신(自信)에 돈독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에 간직한 것이 이러하니 효우(孝友) 충신(忠信)의 행동과 세상을 걱정하고 풍속을 개탄하는 뜻은 굳이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다.

결백한 지조와 고상한 의지는 청명하게 갠 하늘과 눈이 갠 뒤 아주 맑아서 검은 먼지 없는 것처럼 깨끗하고, 곧고 한결같은 포부와 순수하고 아름다운 학문은 빛나는 거울과 밝은 해가 환히 비추어 의심이 없는 것처럼 빛나도다. 


한경기와 남효온이 어울렸을 수는 있다. 하지만 도무지 어떤 계기에서 어떤 경로로 어울리게 된 것인지 추론조차 어려운 네트워크이다. 그것은 두 사람의 출신 배경도 그러하지만 연배 때문에도 더욱 그러했다. 


남효온은 1454년생이고 한경기는 조사해보니 1472년생이다. 무려 18살 차이가 난다. 벗이라기보다는 사제지간이 어울릴 법한 나이 차다. 한경기 본인이 남효온과 함께 죽림칠현으로 자칭했었다니 남효온이 죽림칠현을 언제 결성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었다. 남효온은 1482년(성종 13년)에 죽림칠현 결성을 주도했다. 그리고 계산해보니 그때 한경기의 나이 만 10세였다. 이걸 알고 나서부터는 머릿속에서 의문점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10살?.... 10살?!! 계산 잘못한 줄 알고 계속 계산기를 반복해서 두드렸으나 10살 맞다.


남효온의 죽림칠현이 대체 어떤 모임인가. 죽림칠현은 본디 중국 진나라 초기에 일곱 사람이 노자나 장자의 허무 사상을 숭상하여 죽림에서 놀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들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자연을 벗하면서 평생을 유유자적했다. 이를 본받아 남효온도 죽림칠현을 결성할 때 자신 포함 7인을 모아서 시작했다. 그들은 동대문 밖 죽림에 모여서 소요건을 쓰고 술을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10살이던 한경기가 있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혹시 뒤늦게 참여한 건가 추측을 해봤지만 홍유손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1482년 죽림칠현을 결성하는 바로 그 장소에 이미 한경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경기는 결성 멤버였던 것이다. 평균 나이 20대 중반이 넘는, 당시로는 아저씨들이 모인 자리에 10살짜리 아이가 함께 있었다니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되어서 다시 한번 더 계산기를 두드려보았지만 10이 계속 나오는 걸 보고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한경기는 대체 언제부터 자신의 조부 한명회를 수치스러워했던 것일까.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은 조부와 다른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면 말이다. 신념도 보통이 아닌 인물이다. 그의 묘지명에 따른다면 평생 자신의 결심을 그대로 유지하고 살았다. 사실 한경기의 입장에서는 태어났더니 공신 자손이라는 자신의 타이틀은 감지덕지할 천운이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한명회의 다른 자손들처럼 혜택을 마다할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굳이 남효온과 인연을 맺었고, 조부와 다르게 살기로 마음먹고 행동했다. 그것도 최소 10살부터 말이다.


남효온이 소릉 추복 상소를 올린 해는 그가 24살, 한경기는 6살이던 1478년(성종 9년)이다. 그 일로 조정은 시끌벅적 난리가 났고, 남효온은 평생 벼슬을 못하게 되었다. 불온한 자로 낙인찍혔을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도 조정에서 소릉을 복권하지 않으면 절대 벼슬에 나아가지 않을 거라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런 위인이었으니 한명회가 남효온 이름 석 자를 모를 리 절대 없다. 그런데 그의 친손자 한경기가 남효온이랑 벗이었다니. 이것은 그 무렵 이미 한명회가 자신의 손주 한경기를 포기한 상태였던 것이거나 아니면 한경기가 한명회에게 남효온과 어울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었든 한명회와 한경기, 이 조손 간의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았던 걸까 상상하게 된다.


남효온은 1492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때 한경기는 20세였다. 남효온의 <육신전>이 대체적으로 그의 말년작이라고 추정되고 있으니 특별한 여행의 기록이 없는 1490년인 36세 무렵에 쓰지 않았나 개인적으로 그렇게 계산하고 있다. 물론 더 조사해보고 바뀔 수 있겠지만. 이는 한경기가 1489년에 사마시에 합격했음에도 돌연 대과는 응시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과도 연관 지어 볼 때 적절한 시점으로 생각된다. 1489년에서 1490년으로 넘어갈 즈음 한경기는 자신의 조부가 그런 명성을 얻게 된 것과 관련해서 알고 싶지 않던 어떤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아닐까. 


아무튼 남효온이 언제 정확하게 <육신전>을 썼던 아마도 한경기에게도 그것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남기면 목이 위험할 수 있다는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작성된 남효온의 <육신전> 초고를 접했을 한경기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걸 보았던 한경기는 어쩌면 조부의 무덤을 다시 조성하면서 지석을 새로 제작해 넣어야 했을 때 한명회가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킨 것을 스스로 판단해서 넣고 싶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한명회가 좌절시킨 사육신에 대한 이야기를 오히려 그 한명회의 친손주가 상당히 일찍 접했다는 것은 너무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심지어 그럼에도 그는 조부의 편을 들지 않았다는 것이 더 놀랍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10대에 좋은 직장을 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줄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공부를 한 뒤, 정작 20대에 방황을 한다. 이 길이 맞나, 저 길이 맞나. 무려 3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갈팡질팡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10대에 자신에 대해 탐색할 수 있는 공부를 할 수만 있다면 2-30대에 그렇게 흔들리지 않지는 않을까. 그리고 이 생각은 한경기를 만나고서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10살에 이미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탐색을 끝내고 자신의 길은 할아버지와 다르다고 결심한 그의 뚝심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의 묘지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그가 그런 절개를 가진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自信)에 돈독해서"였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자신이 무얼 잘하는 사람인지, 자신이 목표로 하는 삶이 무엇인지 등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는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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