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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클레어 Oct 22. 2022

조선 최고의 독서왕 백곡 김득신의 위로

역사인물 탐구 에세이

나는 입시를 하면서 참 고배를 많이 마셨다. 지금도 중고등학교 학생 때로 돌아가 입시를 하라고 하면 두 번 다시 못할 것이다. 그 정도로 질렸다.


백곡 김득신을 알게 되었던 것은 아마 고등학교 때로 기억한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한창 17-18세기 한국사를 깊이 공부하면서 김득신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그의 인생사가 그토록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았다.


백곡 김득신은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았는데 당시 천연두는 노약자와 아이들을 많이 죽게 만든 무서운 병이었고 그는 겨우 살아남기는 했지만 그 후유증을 앓아 지각이 발달하지 못해 둔했다고 한다.


그렇게 김득신은 지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시대 다른 인물들과 달리 10살이 넘어서야 겨우 공부를 시작했고, 19 사략 첫 장 26자를 세 달이 넘도록 떼지 못했다고 한다. 방금 본 것도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고 늘 새로워하는 심각한 학습장애를 앓았던 것이다. 집안의 어린 하인이 귀로만 듣고 금방 줄줄 외우는 걸 그는 끊임없이 반복해서 보고 읊어도 외우지 못했으니 그의 학습장애가 얼마나 심했던 것인지 알 수 있다.


김득신의 아버지였던 김치는 상당한 수재로 이름이 있었는데 그는 수재인 자신과 다른 아들이 학문에 발전이 더디고 둔해도 화를 내지 않고 조바심 내지 않으며 아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김득신이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고 계속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응원한 것이다.


“학문의 서위가 늦는다고 성공하지 말란 법이 없다. 그저 읽고 또 읽으면 반드시 대문장가가 될 것이다. 그러니 공부를 게을리하지 마라. 열심히 읽다 보면 반드시 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김득신은 책을 읽고 또 읽어서 1만 번 이상 읽은 책만 36권이었고 가장 많이 읽은 사기 백이전이 11만 3천 번이었다고 한다. 책을 한번 완독 하는데도 큰 결심을 해야 하는데 1만 번 이상을 읽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공부량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김득신의 끈기도 끈기지만 부친의 응원이다. 비록 단 한 사람이라도 누군가가 믿어줌으로써 한 사람이 대문장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 부친의 격려와 응원 덕분에 김득신은 심각한 학습 장애를 겪었음에도 끊임없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나이 20세에 처음 글을 지었고, 39세에 진사시에 붙으며 무려 59세에 대과에 급제한다. 당시 대과 급제는 평균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40대였을 때의 일이었다. 조선의 역사에서 이렇게 대과가 늦은 사람은 김득신이 유일하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김득신의 노력이 이루어낸 인간승리의 결실이었다.


인생은 참으로 길다. 그러므로 생이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닌 셈이다. 김득신은 60세 가까이가 되어서야 대과를 합격했음에도 80세가 넘을 때까지 글을 읽고 쓰고 천수를 누리며 인간승리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숙종실록의 대목을 보면 그는 천수는 누렸으나 행복한 죽음은 맞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도둑이 안풍군 김득신을 살해하였다. 김득신은 젊어서부터 글을 읽었고, 늙어서 더욱 부지런하였으나 사람됨이 오활하여(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모르다) 시대에 쓰인 바 없었다. 충청도 괴산 땅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명화적에게 살해되었다.


아마도 김득신은 늦게 관직에 올랐으나 학습장애로 인해 그렇게 오래 벼슬 생활을 하지는 못했던  같다. 대신 그는 본인의 한계를 극복하고 당대 최고의 문장가가 되어 비록 안타까 죽음을 맞이했어도 대단한 벼슬을 했던 것도 아닌데  줄이나마 실록에 실릴 정도의 인물이 되었다.



김득신의 일생을 접하면서 나는 너무도 큰 위로를 받았다. 그 당시 나는 자존감이 상당히 떨어져 위축되어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나는 공부를 못해. 머리가 안 좋아서 공부하면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듯 까먹어 버린다. 나는 느리고 우둔하다'라는 부정적인 암시를 스스로에게 되뇌고 있었다.


그런데 김득신의 삶을 접하던 날, 그 책을 붙들고 눈물을 쏟았다.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책을 1만 번 이상 반복해서 읽으려는 노력을 했었던가? 김득신처럼 학습장애를 앓고 있던 것도 아닌데 왜 끝을 보는 노력을 해보지도 않고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 봐' 하면서 좌절하고 울기만 하는 것인가.


그러면서 스스로 상상해보았다. 물론 글로 전해지지 않지만 백곡 김득신도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그냥 기계적으로 독서만 했을까? 아닐 것이다. 그도 자기 혐오감에 엉엉 울던 날이 있었을 것이다. 몇 번 듣기만 한 집안의 하인도 외우는 걸 자신은 아무리 봐도 외우지 못할 때 얼마나 속상했을까. 심지어 그는 본인이 "나는 안 되는 거 같아"라고 암시하기도 전에 진짜로 주변 사람들에게 "어휴, 너는 진짜 안 되겠다. 그냥 포기해라." 이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부친의 믿음이 없었다면 일찍 무너졌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단 하나의 믿음에 자신을 믿고 공부를 지속했으리라 상상한다. 그렇게 나는 마음속으로 김득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고 굳게 다짐하게 되었다.


사람은 자신이 그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본인이 바라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 김득신은 남들이 안 될 거라는 상황에서 공부와 독서를 반복하면서 당대 최고의 문장가가 되는 본인의 이상향을 그렸을 것이다. 김득신과 대화를 마친 나는 그 누구보다 내가 나를 믿어줘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을 버리고 긍정적인 암시를 하게 되었다. 김득신의 삶을 곱씹으면서 그의 태도를 본받으려던 내게 행복하고 놀라운 경험들이 일어나게 된 것은 그리로부터 먼 훗날의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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