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탐구 에세이
정간공 박호(貞簡公 朴壕)
정간공 박호. 선조 대의 박호라는 인물과는 동명이인이다. 자가 ‘중심’이었다는 것 외에 그의 호는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종손댁 화재로 인해 그가 남긴 문서들이 전부 소실되어 딱히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박호라는 인물을 처음 만나게 된 계기는 조선왕조실록의 중종실록에서였다.
박호는 부친은 무안박씨 목사 박임경, 모친은 창녕성씨 사이에서 태어난 1녀 3남 중 둘째 아들로 성삼문의 외손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문과에 합격했어도 관직 생활, 특히 승진을 하는 데 있어 지속적으로 방해물을 맞닥뜨려야 했다.
그에 대한 널리 알려진 이야기도 별로 없는 데다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남아 있는 기록도 적어서 면밀하게 그의 면모를 살펴볼 수는 없으나 그나마 찾을 수 있고 지금까지 발견할 수 있는 공개된 사료들로 볼 때 박호라는 인물은 자신의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하기 위해 엄청 노력했을 거라고 보인다.
우선 중종실록에 실린 박호의 졸기를 살펴보자.
우참찬 박호(朴壕)가 졸(卒)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호(壕)는 성삼문(成三問)의 외손(外孫)이다. 천성이 진실하고 순박하여 각박한 행실이 없었다. 관직에 있으면서 직무를 처리하는데 남다른 재능과 지혜는 없었으나 몸가짐이 근신하고 사람을 너그러이 대했으므로, 지위가 육경(六卿)에 이르렀어도 지위가 높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졸하였다’라는 사실 한 줄만 있는 정말 짧은 졸기에 사신이 남긴 논평이 인상적이다. 이 졸기를 본 누군가는 ‘직무를 처리하는데 남다른 재능과 지혜는 없었으나’라는 평에 박호는 그렇게 빼어나게 똑똑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고 했지만 박호의 배경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달한 위치를 살펴보면 나는 그가 천성이 순박하더라도 내면이 상당히 단단한 인물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과 방목을 보면 박호는 식년시를 35세에 합격했고, 37세에 대과에 합격한 것으로 나온다. 졸기에서 보이는 ‘남다른 재능과 지혜는 없었으나’의 문구가 떠오른다. 그러나 여기의 함정도 생각해봐야 한다. 박호에 대한 정보가 워낙 없어서 그가 어떻게 학습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애초에 스승에 대한 혹은 학문 계보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얘기는 독학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추측된다. 만약 독학을 했다면 당연히 과거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 유명하고 좋은 스승을 만났어도 결국 과거에는 합격 못한 한명회를 떠올려 보면…. 이하 말은 아끼겠다.
박호는 외가가 멸문함으로써 성장과정에서 그 풍파를 같이 받았어야 했는데 좋은 스승을 만났다면 과거에 더 일찍 합격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재능을 꽃피울 수 있으려면 뒷배경이 탄탄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과연 그가 그렇게 빼어나게 똑똑하지 않았다 하는 대목은 타고나길 그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역으로 생각해보면 외조부에 대한 조정의 평가가 여전히 좋지 않은 상태에서 그 모든 불이익과 불편을 이겨내고 우참찬까지 오른 그의 모습이 바로 그가 타고난 재능과 기량을 노력을 통해 극복하여 마음껏 발휘한 것이 아닐까.
박호는 1502년(연산군 8년) 알성시 문과에 급제를 했다고 하는데 그의 이름이 처음 보이는 부분은 연산군 11년 연산군이 이항이라는 인물이 죽을 때 유언이 있었는지 의금부도사였던 박호에게 묻는 대목이다. 당시의 동명이인인지 아니면 그 박호가 맞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만약 이 박호가 그가 맞다면 연산군 11년에 그는 종6품에 해당하는 의금부도사에 재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다음으로 그의 이름이 보이는 시기는 1512년(중종 7년)으로 건너뛴다. 그해 여름 북쪽 지역에 가뭄이 듦과 동시에 무신을 새로운 군수로 보내야 할 일이 발생했던 것인지 당시 함경도 단천의 군수로 있던 박호를 잉임(기한이 다 된 벼슬아치를 그대로 머물게 하는 것)해야 하는지 아니면 무신 출신의 새 군수를 파견해야 하는 것인지 여러 의논이 있었다는 대목이다. 당시 전 단천 군수였던 박호는 꽤 일을 잘해서 지역민들의 신임을 얻고 있는 상태였다고 나온다. 군수의 품계는 종4품이었으니 그가 여기서 계속 언급하고 있는 박호라면 그는 중종 7년에는 단천 군수로서 종4품에 재직했고, 외관직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다음 1513년(중종 8년)에는 사복시 첨정 박호를 질정관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사복시는 각 도의 목장에 소속된 말의 상태와 번식을 담당하는 기구로 특히 당시 말은 명나라와의 외교에 필수적인 요소라 정치외교적 측면과 교통 및 군사적으로도 중요해서 국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때문에 사복시에서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마필을 생산하고 관리하기 위해 어마를 사육하는 살곶이 목장도 설치하고 지방에는 감목관이 관할하는 목장과 별도의 제주도 목장을 설치하여 운영했다고 한다. 사복시의 관원은 여마와 구목에 관한 일뿐 아니라 조선 전기부터 왕이 궁궐 밖으로 거둥 할 때 좌위에서 시위하던 보패 밖에서 왕을 수행하며 호위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사복시 첨정은 종4품으로 1명이 재직하는데 박호가 당시 그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편 질정관은 조선시대 중국에 보내던 사신의 일원으로 특정의 사안에 대해 중국 조정에 질의하거나 특수 문제를 해명하고 학습하는 일을 담당하는 임시 관직이었다.
앞서 박호라는 인물이 계속 등장했음에도 가만히 있다 이 기사에서 처음으로 사관은 논평을 붙이는데 이때 박호가 바로 성삼문의 외손이라고 밝힌다. 왜 하필 이 지점에서 어찌 보면 충격적일 수 있는 논평이 붙었을까. 그 자세한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이 기사를 기점으로 중종이 박호를 사헌부 장령으로 제수하고 그때부터 박호의 험난한 승진길이 시작되었기 때문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박호의 탄핵을 주장하는 대간들의 주장을 잘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다. 사헌부 장령에 제수된 박호는 그 인물이 대간을 하기에 합당하나, 난신 성삼문의 외손이기 때문에 갈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헌부 관원으로 직책을 하는데 박호의 인물됨은 문제없는데 그의 배경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에 중종이 한발 물러서 그를 정5품 사의로 옮겼더니 거기서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송사를 결단하는 데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옮기라고 한다.
사의는 장예원에서 노비 관련 송사의 판결을 담당하던 관원이라고 한다. 그가 송사를 결단하는데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가 판결을 잘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떻게 감히 역모를 도모했던 난신의 자손이 '죄에 대해 공정한 판결'을 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에 앉을 수 있냐는 뜻인 것 같다. 중종은 처음에는 그를 계속 갈라는 탄핵서를 윤허하지 않다가 결국 끊임없는 요청에 백기를 들고 물러난다.
그리고 이 지점부터 좀 눈여겨 보이는 대목이 나타난다. 1514년 경학과 사장에 밝은 사람을 뽑으려 영의정 유순이 28인을 선발하는데 그 안에 박호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 이후에 그가 어떤 관직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나오지는 않으나 1517년 8월 5일 자의 경연 도중에 박팽년의 외손 이귀를 포상했다가 난감한 일을 겪었다는 얘기가 나오다가 경연관들이 한마음을 모아 안 그래도 이 얘기가 '난신의 외손들'을 관직에 제수하려 할 때마다 반복되는 문제라며 중종으로 하여금 이들의 현직을 허통 하라는 성덕을 보여주길 청한다고 건의한다.
그다음 기사를 보면 같은 해 중종은 그 건의대로 이조를 시켜 박호를 사헌부 집의에 임명하려 하는데 경연관들과는 다른 대간들의 입장에서 또 '아니 되옵니다'가 나온다. 이에 중종은 대신이던 정광필과 신용개에게 조정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려면 대신이 나서야 되지 않을까 하는 암시를 준다. 박호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던 두 사람은 중종의 의중을 읽고 자신들 또한 박호를 아깝게 생각한다고 얘기하며 중종의 뜻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이에 용기를 얻은 중종은 박호가 사헌부 집의에 머물 수 있도록 한다.
그 뒤로 몇 번이나 승진시키려 할 때마다 대간들도 자기 역할은 해야 하니 '아니 되옵니다'를 외치고 중종은 대신 정광필과 신용개 카드를 앞세우고 "그런데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실상 모든 사람들이 박호의 사람됨을 아끼지 않느냐"라는 말로 그를 비호하는 줄다리기를 하면서, 박호는 사헌부 집의에서 홍문관 부제학으로 참찬관으로 그리고 사간원 대사간을 하게 된다.
사헌부에 홍문관에 사간원까지 '난신의 외손'이라는 엄청난 리스크를 뒷배경으로 한 사람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청요직을 박호는 해낸 것이다. 도대체 자기 자신의 성품을 얼마나 갈고닦았기에 이럴 수가 있는 건지 그의 일생을 꼼꼼하게 정리해보니 박호라는 인물이 너무도 흥미롭다.
심지어 1519년에 박호는 승정원 좌승지에 임명되는데 원칙적으로라면 승정원은 동부승지부터 순차적으로 올라가는 형태였기 때문에 동부승지부터 시작해야 맞는 것인데 좌승지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박호에 대한 중종의 믿음이 엄청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좌승지에 임명되고 또 1522년에는 도승지로 특진되는 등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 사례 말고도 그는 우참찬을 역임하기 전까지 특지를 통한 특진으로 많은 관직을 거쳤다. 오죽하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는 일이 고돼서 병을 이유로 자리를 갈아달라고 요청했는데 추국을 받을 정도로....
아무튼 박호는 순수하게 본인의 진실한 천성과 바른 몸가짐으로 역경의 벼슬길을 헤쳐나간 굳센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박호의 모친 창녕성씨는 사실 박임경의 두 번째 부인이었는데 그의 동복 형은 바로 위의 박증이었다. 박증은 애초부터 벼슬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외조부를 기리며 은거를 택한다. 그런데 박호는 문과에도 합격하고 벼슬에 나아가며 이를 악물고 험난한 관직 생활을 버텨낸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천성이 진실하고 순박하다는 박호는 왜 형 박증과 다른 선택을 했을까?
아니 이미 답은 하나밖에 없다. 박호는 가문을 다시 부흥하게 만들겠다는 절실한 꿈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박증 박호 형제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의 부친 박임경과 모친 창녕성씨가 멸문으로 인한 화병으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박호의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스러진 가문의 명예를 되찾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형은 형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그래서 형 박증이 은거하면서 학문을 통해 외조부의 의지를 이어간다면 자신은 그의 집안을 멸문하게 만든 조정으로 나아가 외조부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가 계산했던 것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실제로 박호의 관직생활은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의 외조부 성삼문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그가 버텨내며 진실된 행동을 보일수록 사람들은 그와 그의 집안에 대한 편견을 버렸다. 중종 대의 박호의 존재는 200년 뒤 숙종 대에 사육신이 복권될 때 영향을 끼칠 정도로 상당히 유의미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핍박 속에서도 바른 행실을 하면서 버틴 박호의 노력은 그의 가장 간절했던 꿈을 이루게 했다.
난신의 외손이 그 난신이 죽이려고 했던 자의 후손 왕 곁에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사람들로 하여금 '외조부가 난신'이라는 불명예를 '외조부가 충신'이라는 명예로 기억하게 만든 것이 박호가 이뤄낸 최고의 승리이자 생의 의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