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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클레어 Nov 11. 2022

자신의 길을 만들어 낸 영재 유득공과 청장관 이덕무

역사인물 탐구 에세이

영재 유득공과 청장관 이덕무


지난해 마음이 잘 맞는 동기와 앞으로 뭐해 먹고살 것인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진지하게 문과 출신의 밥벌이는 어떤 것이 좋을까 하다가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보자고 했었고, 그게 과연 먹힐지 동기의 지인에게 알파테스트를 해보았다. 동기의 지인은 수요조사 겸 고객 인터뷰에 흔쾌하게 응해주었으나 "그래서 이게 뭔데... 나는 대체 뭐를 위해 한 거지?" 하며 본인이 해주고도 우리의 프로젝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당연하다. 어쩌면 동기의 지인은 프로젝트를 이용할 고객의 페르소나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프로젝트였던 터라 우리는 세밀하고 정확하게 고객 페르소나를 정의하지 않고 들이밀어 실패했고, 결국 호기롭게 시작했던 프로젝트는 두 사람의 의욕이 꺾이자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이런 어디 가서 사이드프로젝트 해봤어요 라고 명함을 내밀어 볼 수도 없는 우스운 경험을 하고 난 후 그로부터 며칠 뒤, 영재 유득공의 고운당 필기(번역본)를 읽다가 너무 재미난 에피소드를 발견했다.



영재 유득공이 청장관 이덕무를 찾아가서 "형암 형님, 우린 대체   먹고살아야 할까요? 제가   아는 거라고는  쓰는 거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하고 묻는다. 이에 이덕무는 붓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더니 "여기 서울에는 온갖 깨진 물건들을 보수해주는 장인이 있다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같은 글쟁이들은 시를 땜빵해주는 땜장이가 되어야   같네." 하고 말한다. 유득공은 눈을 반짝하면서 "시를 땜질해준다고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며 그를 보는데, 이덕무는 "시를 쓰고 싶은데  못쓰는 사람들의 의뢰를 받는 걸세. 그들의 문장을 고쳐주거나 시로 쓸만한 문장을 제공하면서 돈을 받는 거지." 하고 아이디어를 낸다.


이에 유득공은 "그럼 어떻게 우리가 시를 땜질해준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죠?" 하고 묻고 이덕무는 아주 쿨하게 "붓 한 자루와 먹 한 덩이를 가지고 함께 필운대나 삼청동 어름을 돌아다니면서 큰 소리로 '여기 땜장이요- 조선 제일의 시인들이 당신의 시와 문장을 고쳐드립니다! 깨진 시 때워! 글자  술 한 사발과 고기 한 접시-!!' 하고 소리치는 걸세." 하고 대답한다.  말을 끝으로 자신과 이덕무  사람  자신들의 엉뚱한 대화 주제에 웃음을 크게 터트렸 이 얘기를 서영보에게 말해주니 그가 포복절도하며 자신을 ‘시 땜장이’라고 불러줬다는 말을 끝으로 유득공은 이야기를 마친다.



이 에피소드를 보면서 나와 동기가 했던 사이드 프로젝트의 기억과 그날의 대화가 묘한 데자뷔처럼 떠올라 나 역시 웃음이 픽 터졌다. 수단만 다르지 어쩌면 이렇게 250년 전의 사람들과 지금 우리의 대화 주제와 주고받은 내용 구조가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은 건지 모르겠다. 사람 사는 건 시대를 초월해서도 똑같다는 말이 맞나 보다.


유득공과 이덕무는 정조 대의 백탑파이자 노론 낙론계의 실학사상가들로 우리에게는 규장각 4 검서관(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리수)으로 이름이 전해지고 있고, 중국에는 한객건연집 사가시선(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으로 이름을 알렸었다. 두 사람은 양반가 자손이지만 윗대가 서얼이었기에 대대로 서얼끼리 혼맥을 맺어 이루어진 집안 출신으로 자연스럽게 서얼로 분류되어 관직 진출에는 제한이 있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이미 서얼허통운동이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던 터라 문과 시험은 볼 수 있었는데, 답안지에 '서얼 출신'임을 밝혀야 했고 어쩌면 그것은 합격자를 가르는 요인으로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유득공의 사례를 보면 그는 사마시에 합격했기 때문에 문과를 여러 번 도전했으나 계속 낙방한다. 처음에는 본인의 실력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알면 알수록 그의 출신 배경이 낙방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결국 그는 문과를 접고는 우울함을 달래고자 여행을 떠났는데 그것이 그로 하여금 21도회고시를 쓰게 하고 역사 지리에 더욱 관심을 갖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이덕무도 상황은 비슷했다. 결국 백탑파의 4 검서관들은 원래대로라면 당시로서 성공한 인생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문과 자체로는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는 없었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져준다. 모두가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하는 소위 '주류 인생 정석의 코스'를 애초부터 꿈꿀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펼쳐나가야 하는가?


이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웃음을 잃지도 않았다. 물론 '태생적 한계 조건' 때문에 애초부터 뜻을 펼칠 수 없음에 한탄을 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몰두하며 자신들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우리는 백탑파들이 벼슬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살았다는 착각을 한다. 그런데 서얼 가문이었어도 이들은 어엿한 양반 집안이었고 상대적인 어려움이었던 것이지 보통의 양민들보다는 그래도 처지가 나은 편이었다.


그렇다. 벼슬을 하지 못해 꾸준한 봉록을 받기 어려워 안정적인 생활형편이 어려웠던 것이지 일단은 직업이 없더라도 손가락만 빨 정도로 당장의 형편이 근근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를 지금의 상황으로 가져와 보면 당장에는 타의적으로 직장생활을 할 수 없는 백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백수의 운명을 필연적으로 타고나야 했던 이들은 어떻게 자신들이 먹고살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길을 모색했을까?


다시 위의 에피소드로 잠깐 돌아가 보면, 두 사람의 해학적인 대화가 현재 디지털노마드라고 하는 업을 만들어가는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어째서인지 지식(정보) 창업자들이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 시대에 이해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들은 일단 직장은 없으나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가문의 부동산'이라는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랬기에 다음으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재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유득공은 시인이자 역사 해석에 탁월한 분석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시와 좋아하는 역사를 결합해서 21도회고시라는 작품을 써냈고, 원체 호기심 많은 성격이라 이것저것 다양한 지식을 수집하고 탐구했는데 그중 평소 관심을 갖고 있던 지리분야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한 뒤 그의 역사 분석력과 결합하여 역사지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우리에게 유명한 <발해고>를 엮어냈다.


이덕무는 유득공 피셜 자기 세대에서 시와 문장을 가장 잘 쓰는 데다 그것의 장르적 문법을 이해하는데 뛰어난 사람이었고 간서치라고 할 정도로 독서법에 능한 데다 정보를 체계적으로 뽑아내어 정리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가 습득한 모든 정보들을 자신의 문장으로 풀어 백과사전식으로 엮은 문집인 청장관전서를 펴냈다.


물론 이들은 틈틈이 시를 쓴 다음 이를 문집으로 엮어 지인들을 통해 청에 보내어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콘텐츠를 만들고 마케팅까지 완벽했다. 이렇듯 이들이 변두리에서 주류와는 전혀 다른 길을 만들어가자 오히려 이것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그 명성을 들은 홍국영에 의해 정조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이들의 스토리텔링은 정조가 만들고 싶은 스토리텔링과도 너무나 찰떡이었기에 이들은 정조의 특별한 명으로 규장각의 4 검서관에 기용되어 높은 곳까지 오르지는 못해도 꿈에도 그리던 문과직의 벼슬을 할 수 있게 된다.



18세기 후반 지식과 정보의 폭증, 그리고 기술의 발달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조선을 기준으로 얘기했지만 동시대에 서구권에서는 이미 산업혁명과 기술혁명, 그리고 시민혁명이 진행된 상태로 그들의 시대로부터 대략 3-40년 얼마 안 가 초기의 기차, 카메라, 자동차, 컴퓨터 등이 만들어졌으니 그야말로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은 인류의 지성사, 과학기술사에서 큰 획을 그은 시대였다.  


유득공과 이덕무는 18세기 후반의 시대적 의미를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모양이다. 지식과 정보가 폭증을 하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걸 단순히 수집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편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나 지식정보가 범람하는 순간 뾰족한 '큐레이션'은 당연해야 한다. 이는 18세기 후반을 살았던 당대 다른 지식인들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에서 현재 빅데이터를 다룰 수 있어 상상도 못 할 양의 지식 정보가 넘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의 업을 만들어 가야 하는지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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