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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클레어 Nov 12. 2022

꼭 우위를 가려야 해? 신숙주의 삶 vs 성삼문의 삶

역사인물 탐구 에세이

문충공 신숙주와 충문공 성삼문


15세기의 인물 중에 가장 좋아하는 인물을 고르라면 신숙주를 선택하는 편이지만 언제나 마음이 많이 가고 신경 쓰이는 인물은 성삼문이다. 일단 신숙주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가 너무도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이라 내가 이해가 잘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본인 능력으로는 가만히 때만 기다려도 정승까지 할 인물이 왜 계유정난에 가담한 건지 그 선택이 이해 가는 건 아니지만 무슨 꿈과 욕심을 갖고 있었는지 그 부분은 어느 정도 머리를 끄덕일 수 있다.


하지만 신숙주를 상당히 좋아하는 나는 굳이 '신숙주는 변절자가 아니다.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옹호하는 주장을 만나면 상당히 불쾌하고 화가 난다. 변절자는 아니긴 하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다만 글쎄, 아무 잘못 하지 않았다는 그 주장은 듣는 신숙주도 민망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를 옹호하는 주장을 하고 싶다면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세조를 옹립해서 조선의 정치 시스템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당대) 현실 문제는 잘 파악하는 통찰력이 있었다.' 정도면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굳이 신숙주를 옹호하고자 성삼문의 머리채를 잡는 주장도 답답하니 불쾌하다. 그 근거로 드는 것이 신숙주는 8개 국어가 가능한 천재였고, 외교 감각도 탁월했으며, 문장도 뛰어났기 때문에 살아서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겨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진짜로요....? )인데, 반면 일찍 죽어버린 성삼문이야말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거로 드는 이 문장이 너무나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 부분은 언젠가 내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해서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우선 신숙주가 살아서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다, 이것은 그의 업적이니 당연히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 맞다. 그런데 그게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라는 방향으로 간다면 이 부분은 의아하다. 신숙주는 그가 남긴 시들에 따르면 그 자신의 인생 목표가 '영웅이 되어 세상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신숙주가 역사적인 선택을 하는 기준이 되었던 모양이다. 내가 이 선택을 통해 영웅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 그렇다면 이것이 정말로 타인인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


신숙주가 영웅이 되어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논리대로라면 조선의 민중들은 가만히 손 빨고 영웅 1인에게 기대야 한다는 의미인가? 정말로? 하지만 놀라운 것은 당시 이미 인재풀은 차고 넘쳤다. 살아있는 신숙주 역시 일 잘하는 대신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신숙주보다 더 앞장서서 조선의 시스템을 무너뜨린 한명회조차 일은 진짜 무한 동력 가동하듯이 했다. 물론 그에 대한 보상도 굉장히 많이 뜯어냈지만 ^^. 내가 이 정도로 일하는데 이 이상은 받아내야죠 같은 느낌?


다시 말해 반드시 신숙주가 있어야만 돌아가는 역사도 아니다. 역사의 주인은 특정 뛰어난 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숙주의 선택이 백성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신숙주의 선택은 전적으로 신숙주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참고로 여진 정벌에서의 승리도 그의 업적으로서 중요하다고 하는데.... 물론 문관 신숙주를 무시해서 그의 판단력을 듣지 않은 양정이 패배하고 신숙주가 승리를 이끌어 낸 것은 박수 쳐줄 일이다. 하지만 여진 정벌은 반드시 그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했었어야 하는 일이다. 아니 그럼 관료가 국방을 튼튼하게 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이것만으로 그가 백성을 구원한 영웅? 그건 잘 모르겠다. 그가 아니어도 구치관도, 한명회도 모두 여진을 정벌하는데 온 힘을 썼다.


그의 문장력으로 다양한 책을 남겨 민족문화에 도움이 되었다 라는 주장에 대해서 말하자면 물론 그랬다. 근데 오랜 시간이 흐르며 사라진 것도 많다. 민족문화에 도움이 되었다는 게 그게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정체성 뿌리의 흔적으로서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당장에 먹고살기 힘든 민중들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하면 그건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그의 현실 실무적 감각과 외교 감각이 백성에게 도움이 되었나? 물론 되었다. 하지만 여진 정벌 때와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관료라면 외교를 잘해야 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심지어 그건 그의 전문 분야였다. 전문성 있는 분야에서 일을 잘하지 못하면.... 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겁니까 소리를 들어야 하는 문제다.


덧붙이자면 그의 마지막 유언인 '일본을 주의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하십시오.'는 그의 외교 실무의 감각이 빛을 발한 한 획이라고는 생각하긴 하는데.... 일본이 전국시대가 되어버려 교류의 문이 끊긴 그걸 어떡해야 하나. 결국 신숙주는 본인이 꿈을 이뤄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긴 한데 이러나저러나 좀 더 비범한 개인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신숙주는 그저 현실의 흐름을 아주 잘 읽었을 뿐이다. 훈구대신으로 승승장구한 그가 결국 이시애의 난으로 부친을 일찍 잃어 자신이 끼고 애지중지 키운 친손자는 초기 사림파의 수장 김종직에게 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신숙주는 본인의 선택이 세종대왕 대에 이룩한 정도전의 이상이 그대로 구현된 정치 시스템, 다시 말해 '왕도'를 개박살 내버린 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지적하는 신진들인 사림의 시대를 인정했고, 그의 친손자를 사림으로 전향시켰던 것이다.



이번에는 성삼문의 삶이 죽음으로써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민중들의 삶에도 무의미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정리를 해본다면 나는 결코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삼문의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세조에게 불충을 한 역신'으로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가 되었음에도 사람들은 암암리에 시대를 초월해서도 그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전했다. 왜 그랬을까?


지금의 우리 중 일부는 단종 복위 운동을 배워도 이미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시도한 이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던 것이며 오히려 당시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친 거 아니냐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최신 연구에 따르면 계유정난-단종 복위 운동은 당시 사람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세조의 왕위 찬탈 후 설령 그가 어떤 노력을 하려고 했던 그 밑에는 공신인 예스맨들 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공신들로 인한 사회의 부정부패 문제가 심각했다. 실제로 세조실록의 사료들을 보면 진짜로 암담한 기사들이 많다. 후대의 우리는 어떻게든 사료를 뒤져서라도 옹호할 건덕지를 찾아보려고 하지만 당대인들의 눈에는 당장에 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스러운 모습이 먼저 비쳤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실드를 치며 세조의 업적이라고 해주고 싶은 것들을 묶어도 이것이 공신들의 부정부패로 인한 민중의 피해량보다 적었다. 그 상황을 본 사람들은 이 시대는 "정의와 도가 무너졌다"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이 깨달음은 새 시대의 싹인 '사림'이라는 정체성의 근간이 된다.


다시 말해 성삼문이 시도했던 단종 복위 운동은 단순히 지배층 간의 권력 다툼일 뿐 그 밑에 지배받는 일반 민중들에게는 별 무의미했던 일이 아니라 보통의 민중들에게도 "정의와 도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올바르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사상적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고민은 '조선의 선비'란 무엇인가 하는 한국의 유학(철학) 사상의 근간이 된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날 수 있던 것도 이 고민에 대한 대답을 찾아낸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불의에는 저항한다" 그것이 바로 조선의 선비라는 존재라는 것.


관학파의 시대였다면 이러한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300년 이상을 이어질 사림의 시대의 싹을 뿌린 것, 이것이 바로 성삼문이 죽음으로써 남긴 것이다. 때문에 사림들은 끊임없이 성삼문을 기억하고 추숭 했다. 복권이 되기까지 무려 200년 간 이상이 걸렸음에도 무너진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후대의 우리가 신숙주의 , 성삼문의  각자를 옹호하기 위해 서로의 머리채를 잡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들도 그것을 바라지 않을 거라 생각된다. 그들은 각각의 꿈과 이상이 있었고 자신에게 가장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것만으로 그들은 자신이  선택에 행복했을 것이다. 그들의 삶에 우위를 가리지 말아야 한다. 각자의 선택이 제삼자이자 후대의 타인인 우리가 현실이냐 이상이냐는 이분법적 잣대로 가를 만큼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현실적이라고 알려진 신숙주는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이라는 꿈속에 살며 그걸 이루고 싶어했고, 이상을 추구한다고 알려진 성삼문은 정작 자신이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하고 바라던 ‘은거’의 꿈을 포기하고 오히려 현실에 발을 딛고 치열하게 살다 맞닥뜨린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고 목숨을 바쳤다. 신숙주와 성삼문의 삶을 비교하면서 거론하는 현실과 이상의 잣대의 구분은 너무 일차원적인 분석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사람들 역시 의문을 갖는다. 어떻게 이렇게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이 우정을 나누었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이들의 선택을 정리하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은 정치적 이념이나 가치관을 공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자신이 스스로에게 충실하고 있다는 점에 서로 끌렸던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세상의 구원자'가 되고 싶었던 신숙주는 자신의 삶이 끝날 때까지 벼슬을 하면서 그것에 충실했고, '때가 되면 자연에 은거하여 지혜를 전수하는 현자'가 되고 싶었던 성삼문은 정의와 도가 무너진 현실과 불의에 저항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후대의 삶을 살아갈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자신 스스로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던 '자신의 선택'에 얼마나 충실할 수 있는가?"

신숙주와 성삼문 두 사람은 우리에게 이것을 묻고 있다.

한 명의 시호가 문충이고 다른 한 명의 시호가 충문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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