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세상이 불친절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그렇다, 어렸다 아주 많이!
이 세상살이는 왜 이리 쉬운 게 없을까? 누가 정답을 주면 좋겠다.
정답지 인생.
문제집에 익숙하던 어린 나의 미숙한 바람이었다.
세상을 살아나가고 어른이 되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원래 세상과 인생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오로지 그 답을 만들어가는 '나'만 있을 뿐이었다.
이걸 깨닫자 내 인생이,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세상살이에 답이 없는 이유는 80억의 사람이 있다면 80억의 우주(세상)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다채로운 세상에 내가 합의할 만한 딱 떨어지는 정답이 없는 것이다.
답이 없는데 왜 답을 찾아야 하나.
그렇다면 우리가 학교를 다니면서 왜 시험을 보는가에 대한 질문을 가질 수 있다.
그동안은 나 역시 시험문제란 학습한 것이 제대로 머리에 입력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시험마저 치르지 않는다면 인간은 절대 공부라는 인풋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공부 관련해서 상담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저요, 시험문제에 대한 이의제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주장해서 이의제기를 해도 될까요?"
혈기왕성하게 문제제기를 준비하는 상담자를 보면서 내 예전 모습이 떠올랐고 이제야 시험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던 내게 말씀해 주시던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너는 너무 많이 아는구나. 너무 똑똑해서 문제다."
어감이 좋지 않아서 늘 듣고 싶던 '똑똑하다'는 표현인데도 무슨 의도로 하신 말씀이신 건지 어째 찜찜했다. 그런데 나도 시간이 흘러 경험이 쌓이다 보니 이제는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알 것 같다.
시험문제는 미친 듯 인풋 한 것을 곧이곧대로 아웃풋 해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험에서 보고 싶은 것은 해당 문제에 주어진 조건만 보고 거기에서 답을 이끌어내야 하는 실전 응용력이었는데, 나는 무작정 모든 교과내용을 암기한 뒤 적용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봐도 그렇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문제가 주어지면 해결하기 위한 답을 이끌어내야 한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것은 실상 그것을 연습하기 위함이지만 한국 교육제도 시스템 상 시험의 본질은 가려지고 말았다.
사실 한국의 교육제도가 문제가 많이 심각한 것은 맞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이게 왜 잘못됐는지 알면서도 못 고치는 데서 문제인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도 똑똑한 사람들이 교육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거나 사실은 알지만 그걸 설명하고 이해시키지 못해서였다.
나는 이것도 수학고수님 덕분에 깨닫게 된 것이다.
수학을 접근하는 방법이 달라지자 나는 세계를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다른 학문들의 본질을 보는 눈이 생겼다. 모르더라도 적어도 본질을 파고들어 가볼 수는 있게 되었다.
모든 학문의 끝은 세상과 인간에 닿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학습의 본질이 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왜 옛 선현들이 학습을 자기 수양과 연결했는지도 말이다.
이 모든 것은 공부법, 공부의 본질을 깊게 탐구해 본 경험이 있어서 더 가능했던 모양이다.
( 천주교라는 ) 학문은 스스로 깨닫는 것이라 누군가에게 이해시키지 못하는 건데
어찌 신도를 늘릴 수 있겠습니까?
- 윤지충 바오로 복자
지혜라는 것은 전수할 수 없고 받을 수도 없으며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불친절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답을 떠먹여 질 수 없는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