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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Apr 16. 2016

우리는 이웃의 아픔에 얼마나 같이 슬퍼할 수 있는가.

Fight for Justuce; Hillsborough disaster

2014년 4월 16일은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슬프고 아픈 날이 되었다. 그로부터 벌써 2년이 흘렀다. 누군가에게 그날 이후의 시간은 멈춰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아직도 그들의 슬픔은 제대로 위로받지도 못했음에도. 아니, 위로받을 수는 있을까. 감히 그들의 슬픔의 정도를 타인이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공감이 부족한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임을 알기에, 함부로 글을 쓰는 것이 두렵고 계속 망설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함이 아닌, 당사자가 아닌 우리가 같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27년 전에 영국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4월 15일은 영국인들과 축구팬들에게는 가슴 아픈 날이다. 1989년 이날, 영국 쉐필드 (Shefield)의 힐스보로 (Hillsborough) 스타디움에서 96명이 사망하고 766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철저한 인재(人災)였다는 점에서 영국 역사상 최악의 재난으로 손꼽히며, 무엇보다도 희생자의 절반이 10대였다는 점에서 최악의 비극으로 남아있다.


영국 중부의 도시 리버풀 (Liverpool)은 이른바 산업 혁명 이후 급격히 발전해서, 1800년대에는 런던보다 더 부유한 도시였다. 그러나 공업의 중심이 석탄에서 석유로 바꿔감에 따라서, 잉글랜드의 여타 중북부 공업 도시들처럼 급격한 쇠퇴의 길을 겪었다. 그 시절 리버풀의 두 가지 자랑거리, 유럽을 호령하던 축구팀 리버풀 FC와 세계를 누비던 비틀즈는 급격한 도시의 쇠락으로 상실감에 허덕이던 노동자들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이제 비틀즈는 없고, 비록 리버풀 FC 또한 도시의 쇠락과 함께 많이 쇠퇴하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충성심 가득한 팬들을 몰고 다닌다.


1989년 FA컵 준결승전에서 리버풀은 노팅엄 포레스트(Nottingham Forest)를 만났고, 양팀의 홈이 아닌 중립지역인 쉐필드 웬즈데이 FC (Shefiled Wednesday FC)의 홈구장인 힐스보로에서 4월 15일에 시합을 갖게 되었다. 영국의 축구 훌리건 (Hooligan)의 악명은 이때도 유명했다. 지금도 축구장에는 무장한 경찰 병력이 배치되어 있고, 불필요한 충돌을 줄이기 위해서 홈팬들과 원정 팬들의 관람 구역은 철저히 분리되며, 그들의 동선도 통제된다. 그 시절에는 훌리건의 문제가 훨씬 심각했고,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시기의 프로야구 초창기 영상을 보면 남의 일만은 아니다).


비극은 그렇게 일어났다. 수천 명의 리버풀 팬들이 경기를 보러 왔고, 지정된 구역으로 들어가는 회전식 입구(turnstile)와 스탠딩 구역으로 가는 통로(tunnel)는 매우 좁았다. 익숙하지 않은 구장에서 팬들은 우왕좌왕했고, 그들을 안내하고 보호할 구단 직원과 경찰의 역량은 충분하지 못했다. 시합의 킥오프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팬들의 성화를 감당하지 못한 경찰이 출구로 쓰이는 문을 추가로 개방해 버렸고, 쏟아져 들어가는 관중 수의 통제와 그 수의 집계는 불가능해졌다. 스탠딩 구역이 이미 만원임을 모르는 후열의 관중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압박해 들어갔고, 먼저 입장해있던 관중들이 압사당하는 끔찍한 일로 이어졌다. 주심은 시합을 중지시켰지만, 노후된 구장 시설 탓에 의료팀이 빨리 진입을 하지 못했으며, 경찰은 현장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 모든 비극은 TV를 통해 영국 전역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목숨의 위기를 느끼고 핏치(pitch)로 넘어가는 관중들을 경찰봉으로 사정없이 내려치는 광경부터, 상황을 알고 있었던 2층의 관객들이 아래층의 관객에게 손을 뻗어 구출하는 모습과 정신을 잃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까지 전부.


빨간 색이 몰려든 리버풀 관중들, 출처는 BBC 홈페이지. 자세한사고 과정은 링크 참조. (http://www.bbc.co.uk/news/uk-19545126)
힐스보로 참사 직후의 사진, 이 모든 광경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참사가 최악의 비극으로 남아 있는 진정한 이유는, 사고 이후에 일어난 일들 때문이다. 사고의 조사 결과, 관계 기관과 경찰이 관중을 통제를 못한 책임은 있지만 처벌과 징계가 필요한 부분은 없다고 결론이 났다. 심지어 사건의 책임을 팬들에게 전가하기까지 했다 - 담당 지역 경찰 (South Yokshire Polic)은 유가족에게 정보의 공개를 거부했으며, 도리어 유족에게 희생자가 평소에 술이나 마약과 관련된 문제가 없었는지에 대해 심문하고 관련된 진술을 (강압적으로) 얻어냈다. 혐의를 씌우기 위해서 심지어 어린 희생자의 시신에서도 혈중 알코올 농도 검사를 시행했다. 그러한 조직적인 은폐와 조작을 통해서, '통제 불능의 술에 취한 훌리건들의 난동으로 인한 불행한 사고'로 결론을 냈다. 언론도 이 장단에 동참했다.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기사로 받아써서 진실을 감추는데 일조했다. 특히 지금도 황색 언론의 대표 격인 더 선 (The Sun)은 '술 취한 리버풀 훌리건들이 횡포를 부렸으며, 시체에서 도둑질을 하기도 하거나 그 위에 방뇨를 하고, 심지어 구조활동을 벌이던 경찰을 폭행하는 등 구조활동을 방해했다’는 헛소문을 기사로 실었다. '진실' (The Truth)이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참사 직후의 The Sun지의 보도 (좌)와 23년 뒤의 사과 보도 (우). '진실'이라고 내보냈던 오보를 '진짜 진실'로 정정해서 내보내는 태도가 가증스럽다.


이러한 성공적인 은폐 조작에는 정권의 비호가 있었다. 당시 수상이었던 마가렛 대처 (Margaret Thatcher)는 노동자 계층과 그들의 스포츠인 축구를 혐오하던 사람이었다. 이 시기의 보수당 정권은 노동자 권익 축소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경찰을 옹호함으로써 정권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려고 했다. 더군다나 비슷한 시기의 대규모 노동자 운동을 경찰의 도움으로 비교적 수월하게 진압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보수단 정부는 경찰의 이미지 실추가 정권의 약화로 이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유족들의 강한 반발과 요구에, 정부는 재조사를 시행하는 듯했지만, 결국 정권 내에서는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의 노동당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1997년에 재조사를 시도했지만 '관련 증거 불충분'등의 설득력 없는 이유를 들어 서둘러 종료시켰다. 많은 영국인들에게 이 참사는 그렇게 오도되었다 - 흥분한 축구팬들에 의한 안타까운 참사. 국민들은 정부와 경찰과 그들을 비호하는 언론을 믿었다. 정부와 경찰을 믿고 지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일부는 유가족과 희생자를 비웃거나 조롱하기까지 했다. 지역감정과 계층 간 불화도 그런 여론 형성에 일조하였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은데다가, 졸지에 사고의 원흉으로까지 몰린 유족은 분노했다. 유족들은 스스로 싸우기로 했다. 위원회를 조직했으며 (Hillsborough Family Support Group, HFSG), 정부에 끊임없는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한편, 동시에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도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정부의 재조사가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자, 사적 기소 제도 (Private Prosecution Service, 검찰이 불기소한 사건에 대해서 개인이 일정 금액의 공탁금 예치를 통해서 형사 기소할 수 있는 제도)로 직접 관련 경찰 책임자들을 기소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법정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를 선고했으며, 인도적 이유 등으로 곰련 경찰에 대한 재심을 거부했다. 이때가 2000년, 이미 사건에서 10년이 넘었지만 유족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의 싸움에는 다른 국민들의 지원이 있었다. 그들은 각종 캠페인에 동참했으며, 기금 마련 콘서트 등을 통해서 위원회를 후원했다. 드디어 2009년, 힐스보로 추도식에 모인 리버풀 시민들의 강력한 요구를 업고서 국회의원 앤디 버넘 (Andy Burham)은 국회에 관련 문서 공개를 청구했다. 국회는 30년으로 제한된 정부 문서 비공개 기간을 깨고 문서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유가족 위원회에게 이것은 중요한 성과였지만 또한 새로운 싸움의 시작이었다 - 정부와 경찰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신뢰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들의 요구는 한결같았다. '진실'을 밝히자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완전한 객관적 조사를 원했다. 유가족의 요구에 공감한 국회는 힐스보로 독립 패널 (Hillsborough Independent Panel)을 구성하고 200만 건의 문서에 대한 접근과 강력한 독립 수사권을 승인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위원회의 누구도 정부와 관련이 없었으며, 유가족과도 아무 관련이 없었다는 점이다. 은퇴한 전문가를 중심으로 했으며, 보수/진보 인사, 심지어 종교계 인사까지 골고루 포함되었다. '사실의 조사와 공개' - 이것이 그들의 과제였고 목표였다.


마침내 3년이 조금 못 지난 2012년, 최종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96명의 희생자 중에 정확히 41명이 사고 당시에 생존해 있었으며, 경찰의 대응 부족으로 사망했음을 밝혀냈다. 또한 정부와 경찰, 언론의 조작과 은폐의 과정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사고 당시의 정권과는 상관이 없지만, 현 수상인 데이빗 캐머런 (David Cameron)은 정부를 대표하여 대국민 사과를 하고 기소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청문회(inquest)를 승인했다. 이에 따른 청문회와 심리가 아직도 진행 중이며, 27년이 지났지만 당시의 책임자들은 형사 처벌을 받을 예정이다.




힐스보로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세월호 참사와 너무 유사함에 마음이 아픔과 동시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먼저 비극이 일어난 장소, 힐스보로 경기장은 잘못된 구조와 시설의 노후화로 그 전부터 꾸준히 안전성 문제에서 지적을 받았으며, 장소 변경/시합 연기를 권고받았으나 구단 운영진과 축구 협회로부터 무시당했다. 두 번째, 관련 기관의 행동, 경찰은 현장을 통제하는 데에 실패했으며, 다른 조직과의 공조를 거부해서 더 큰 재앙을 불러왔다. 실제로 사태 후 경기장으로 들어간 구급차는 도착한 14대 중 1대였음이 밝혀졌고 심지어 경찰이 진입을 통제한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경기장 내의 의료 지시조차 관련 지식이 전무한 경찰들이 지휘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지한 경찰은 참사 직후, 관련 기록의 파기와 진술의 조작 등 조직적인 은폐를 시행하고 정보 공개를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정부는 사고의 수습과 회복보다는 책임 전가와 정권의 유지를 위해 참사를 활용했다. 그리고 언론을 이용하여 희생자와 유가족을 매도하는 여론 형성을 부추겼다. 너무나도 우리의 세월호 비극과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 중요한 것은 이 참사가 영국에서는 27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암울함'이 지배하던 그 시대 영국에서 발생한 참사가, 그때의 영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2014년의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참 처연하기까지 하다.




힐스보로 참사와 유가족들의 오랜 싸움은 선진국과 그 시민의식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비록 27년 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책임져야 할 사람들의 비겁한 회피와 비양심적인 조작이 있었고, 진실을 외면한 언론과 정부가 있었다. 많은 유가족들과 관련된 사람들이 심각한 후유증을 앓았다. 스스로 세상을 버린 유가족도 있으며, 현장에 있었던 다른 관중들도 정신적 스트레스로 힘들어했다. 심지어 사태에 책임이 있는 경찰이나 관련 종사자들 조차 심각한 후유증으로 정상적 삶을 살 수 없었다.


관련된 모든 이가 피해자인 이 참사의  총체적인 그릇됨을 바로잡기 위해서 오랜 시간 유가족이 싸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유가족들의 슬픔과 절망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지지였다. 결정적 역할을 한 조사 위원회는 무보수로 자신들의 소임에 최선을 다했다. 진실을 밝히고 싶지 않은 사람들, 언론과 정부의 프레이밍에 넘어간 사람들의 무수한 협박과 회유에도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경제적 후원도 있었다. 유가족 위원회를 지원하기 위한 여러 기금이 조성되었고, 각종 민간 차원의 캠페인 단체가 만들어졌다. 리버풀 구단은 위원회의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으며, 구단을 상징하는 엠블럼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성화를 추가했다. 다른 축구 구단들도 추모에 참여하고 있으며, 지금도 리버풀 구단은 4월 15일에는 시합을 하지 않는다. 리버풀 시민들은 오보로 희생자들을 매도한 더 선지를 아직까지도 불매 운동하고 있으며, 구단도 더 선지의 기자는 여전히 취재를 공식적으로 거부한다.


The Sun지 불매 운동을 하는 리버풀 FC 팬들, 출처는 Mirror.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슬퍼하는 유가족들에 대한 배려와 그들을 바라보는 태도다. 비록 참사가 경찰의 책임을 벗어난 사고로 종결되었지만, 현장에는 많은 수의 다른 관중들이 있었으며, 경찰의 무능한 대처가 방송으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진실은 완전히 가려질 수가 없었다. 많은 이들이 유가족의 활동을 지지했으며 그들의 슬픔을 함께 하고 배려했다. 당시의 사건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세대들도 희생자를 추모하고, 그 시대의 사람들도 그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 이런 추모 행사는 아직도 끊이질 않는다. 당사자들도 아닌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사실 비극과 참사는, 관련되었던 아니던 누구에게나 마주하기 힘든 일이다. 어쩌면 외면하고 잊으려고 하는 것은, 힘든 일을 겪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고 스러진 어린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과 신체의 일부를 잃은 유가족들에 대한 연민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연민만으로는 그렇게까지 오랜 세월 동안 지지하고 응원 힘들다. 타인의 아픔은 공감은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직접적으로 내가 아픈 일은 아니기에.


힐스보로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정의 - justice'라는 말을 꼭 쓴다. 심지어 유가족들도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진실과 정의에 관한 것이다. 억울한 희생의 사실을 밝히는 일은 유가족들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임을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자를 처벌하고, 잘못 작동한 사회 시스템을 바로 잡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그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 현재를 사는 세대가 꼭 해야 할 일임을. 실제로 힐스보로 참사 이후에 영국 축구장에서 스탠딩 구역이 금지되었으며, 경기장 안전 체계가 대폭 강화되었다. 언론매체들에게도 날카로운 경고가 되었으며, 언론 보도를 대하는 비판적 태도의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잘 알려주었다. 유가족들 또한 책임자들의 처벌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가족들의 희생이 조금 더 안전한 사회가 되는 것에 기여할 수 있음이 더 감사한다고 자주 말다.


힐스보로 참사 추모에 참가한 리버풀 시민들, Justice가 쓰여진 머플러가 많이 보인다. 96은 희생자들의 숫자를 의미한다.


세월호 참사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우리 부부는 마트에 갔다가 사람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 계산원에게서 어디서 왔느냐란 질문을 받았다. 영국에서는 인사처럼 듣는 질문이라 별생각 없이 한국에서 왔노라 대답했더니, 할아버지는 정색을 하면서 '이름은 잊어서 미안하지만, 그 페리 사건에 대해서 너무 슬프고 진심 어린 조의를 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너무 예상치 않은 위로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도 해외 소식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영국인을 만나면, 세월호 참사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어보고 위로를 건넨다. 비록 유가족의 백만분의 일만큼도 못 미치더라도, 이런 '사회적 참사'는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피해자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2년이 지났는데 아직 돌아오지 못한 학생들이 있고 배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다. 사태의 느린 해결과 대처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아직도 유가족들은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데 이제 지겹다며 그만 좀 하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힐스보로 참사 때에도 그런 사람들은 있었고, 심지어 아직도 있다 - 최근에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Manchester United)의 몇몇 (정신 나간) 팬들이 힐스보로 희생자들을 조롱하는 노래를 부르다가 구단측으로부터 영구 입장 정지를 당했다. - 그런 일련의 만행들은 이웃의 슬픔을 '남의 일'로만 보는 근시안적 관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월호의 유가족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런 불운한 사고는 잊자고, 지나간 일에 빠져 있는 그런 모습은 '후진국' 스럽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 당신들의 그런 '나만 아니면 된다'라는 태도가, 당신들이 그렇게 바라는 '선진국'이 못 되는 제일 큰 이유라고. 사회 구성원의 일을 같이 공유하지 못하고 타인의 일로만 치부한다는 것 자체가 여유가 없다는 뜻이며, 사회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뜻일 테니까. 또한 사회적 참사의 진상을 조사하고 시스템의 결함을 보완하는 일은, 사실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도. 세월호 사건은 자연재해적인 사고나 일부 사람들만의 과실 치사 재난이 아니다. 사회의 시스템이 일으킨 철저한 사회적 인재다. 그 말은 우리 가족에게, 나 자신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드러난 결함을 보완하지 않고 우리가 외면한다면.


우리는 원래 이웃의 슬픔을 내 일처럼 함께 하던 민족이 아니었던가. 최소한 도와주지 못한다면 절망과 슬픔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억지로 일으키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슬픔을 추스르고 일어나는 것은 그들이 결정할 일이다. 우리는 비극을 회피하지 말고 같이 슬퍼하며, 그들이 일어나려 할 때 도와주면 된다. 그것이 그들의, 나아가 사회 전체의 상처를 보듬는 길이라고 믿는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충분히 슬퍼하도록 배려해줘야 한다. 타인의 슬픔과 절망을 배려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나라가 우리가 진정 지향해야 할 사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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