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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Apr 26. 2016

그렇게 다들 열심히 달린다. 마라톤도, 인생도.

2016 London Marathon

4월의 어느 일요일, 전날 밤의 과음으로 인한 숙취로 쓰러져 자다가 사람들의 환호성과 웅성대는 소리에 잠을 깼다. '아, 뭐지... 일요일 아침부터...' 간신히 일어나서 창밖을 보고 엄청난 인파에 놀랐다. 문득 빌릴 집을 둘러보러 온 날에 집주인 아저씨가 해주던 말이 기억났다.


"좋긴 한데.... 큰 도로가 바로 옆에 있어서...  조금 시끄러울 것 같아서 걱정되는데요."
"그렇긴 한데, 아주 심하지는 않아. 뭐, 런던 마라톤 하는 날에는 꽤 소란스럽겠지만. 그래도 반나절이니까. 하하하"


성격 좋은 집주인 아저씨는 내 걱정에 그렇게 말해줬다. 음. 그런 게 있구나 했지만 조깅이나 마라톤 같은 러닝에는 큰 관심이 없는 터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랬다. 그날은 1981년부터 매해 열리는 런던 마라톤이 열리는 날이었던 것이다. 이미 집 앞 도로와 근처는 관람객들로 빼곡히 차있었다. 행사 좋아하는 우리 부부지만, 아쉽게도 그날은 너무 심한 숙취로 둘 다 못 나갔다 (부끄럽지만;;). 내년을 기약하면서. 그리고 어제, 4월 24일에 열린 2016 런던 마라톤은 다행히도 잘 보고 왔다.




런던 마라톤은 보통 4만 명 정도가 달리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제일 큰 마라톤 대회 중에 하나라고 한다. 그리니치 공원 (Greenwich Park)에서 출발하여 커티 샥 (Cutty Sark), 타워 브릿지 (Tower Bidrge). 카나리 워프 (Caanary Warf)등을 경유한 뒤  테임즈 (Thames) 강변을 따라 버킹엄 궁 (Buckinghanm Palace) 근처의 더 몰 (The Mall)까지. 런던의 유명한 명소들을 따라 달리는 코스로 되어있다. 인기가 많은 만큼, 사실 달릴 기회를 얻는 것도 쉽지 않다. 참가 신청은 1년 전에 해야 하고, 그 1년 동안 다들 엄청나게 연습을 한다.  올해는 약 25만 명이 참가 신청을 했고, 그중 5만 명 정도가 참가의 기회를 얻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모두가 참가할 수는 없으니 여유 있게 뽑는다고 한다). 참가 기회는 무작위로 뽑히며, 절대 양도될 수 없다.


템즈 강변의 소머셋 하우스 근처의 코스. 멀리 런던 아이와 빅벤이 보인다.


어린 시절, 일요일의 대중목욕탕 텔레비전에는 가끔 마라톤 중계를 보여줬던 것 같다. 그 외에는 마라톤 중계를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나는 러닝에 문외한이다. 그래서 참가자가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관람객도 그렇게 많을지는 몰랐다. 아무래도 좁은 런던 시내가 주무대이다 보니, 참가하는 선수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많은 도로를 아예 통제하고 관람객들도 즐겁게 볼 수 있게 해놓았다. 코스 중간중간에는 밴드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참가자들을 격려한다. 역시 야외에서 하는 행사 좋아하는 영국인들답게, 관람객들도 다들 술을 마시면서 같이 노래 부르고 소리치며 참가자들을 응원한다. 이쯤 되면 마라톤 대회라기보다는 '마라톤을 빙자한 축제'라고 불러야 할 듯하다. 참가자들의 재미있는 의상도 볼거리다. 기발한 아이디어에 피식하고 웃으면서도, 그냥 완주도 보통 일이 아닌데 저 무거운 의상들을 입고 뛴다니... 참 대단하다.


코스 주위를 넓게 통제하여 보는 이들도 즐길 수 있게 해두었다.
군데군데 브라스 밴드, 팝 밴드, 클럽 DJ  등등 여러 스타일의 밴드들이 참가자들을 격려하고 흥을 돋군다.


한 번도 장거리를 뛰어 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참가자들에게 경외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들 지도 모르겠다 - 저렇게 힘든 스포츠를 왜 하는 걸까? 심지어 무거운 분장까지 해서 뛰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까지 뛰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당연히 마라톤이 좋으니 달리겠지만, 사실 런던 마라톤이 짧은 기간에 유명해진 이유는 참가자들이 자선 모금을 위해 달리기 때문이다.


런던 마라톤은 일반 참가 신청 외에도, 자선 단체 후원 참가 신청으로 달릴 수 있다. 참가자는 일정 금액의 후원비를 내고, 지인들에게 자신이 어떤 자선 단체를 후원하기 위해 달린다고 광고를 한다. 그 광고를 본 지인들은 참가자들도 응원하면서 자선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참가자는 그 자선 단체의 배너를 달고 뛰고, 그 자선 단체 회원들과 지인들은 참가자들을 응원하면서 마라톤 대회를 같이 즐긴다. 대부분의 재미있는 복장을 하고 뛰는 사람들은, 그저 재미로만 그런 차림을 하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 자신이 어떤 자선 단체를 위해서 달리는 지를 알리고, 그로부터 후원을 얻어내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심지어 직접 관람객으로부터 성금을 걷을 모금함을 들고 달리는 참가자들도 있다. 영국 동전들은 종류도 많고 무겁다. 후원금으로 묵직해진 통까지 들고서 그 힘든 싸움을 하는 것이다. 관람객들은 자선 모금을 위해 달리는 참가자들이 지나갈 때에는 더욱더 큰 응원으로 그들의 행동을 격려한다.


2015년 참가자들 중에는 큰 고환 (testicles) 모양의 Mr.Testicle 의상을 입고 뛴 참가자가 화제였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음흉한 웃음과 함께 주목을 크게 받았다. 이후의 인터뷰에서 그는 고환암으로 21세의 젊디 젊은 나이에 사망한 가까운 친구를 추모함과 동시에, 남성 암 (Male Cancer Awareness) 자선 캠페인 홍보를 위해서 참가했다고 밝혀서 감동을 주었다. 비록 그는 아주 더운 날씨에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너무 무거워진 의상 때문에 중도에 완주를 포기했지만 자선 캠페인의 충분한 홍보 효과와 많은 후원을 이끌어내었음은 물론이다. 때로는 이러한 그들의 자선을 위한 마음이 불행한 사고로 이어질 때도 있다. 올해의 대회에서는 상이용사들을 위해서 마라톤에 참가한 현역 군인이 심장 마비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그 전 해에도 자선 모금을 위해 참가한 여성이 사망했다. 실제로 매회 대회마다 부상과 사고는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선을 위한 참가자 대기 명단은 늘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한 그들의 진지하고 진실된 호소가 존경스럽다.


Jack Woodward란 참가자는 남성 암에 대한 자선 단체 지원을 위해 Mr.Testicle 의상을 입고 참가했다. 출처는 BBC


한 육상 전문가는, 런던 마라톤이 대단한 가장 큰 이유는 출발하는 지점과 끝나는 지점까지 관객들의 함성이 거의 끊이지 않는 대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 다른 마라톤 대회보다 완주율이 높은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마라톤 참가자들이 힘겹게 달리는 동안, 그들의 가족과 지인들 뿐만 아니라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 나온 보통 관객들도 그들에 대한 격려와 환호를 멈추지 않는다. 지쳐서 걷거나 쉬는 참가자들의 셔츠에 쓰여있는 이름을 연호하고 아낌없는 박수를 쳐준다. 대부분의 참가자가 마라톤을 끝내고 소수의 참가자들만 힘들게 종착점을 향하는 후반 시간대에도 많은 관객들이 남아서 그들을 응원해준다.


꽤 늦게, 저녁 식사 시간 즈음에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방송 중계팀은 진작에 철수했으며 안전 펜스도 철거를 시작했고, 의료 지원팀들은 모여서 해산을 준비하고 있었다. 관람객들도 모두들 돌아갔고, 청소 차량은 먼지를 휘날리며 도로를 청소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라톤을 계속해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코 건강하다고 할 수 없는 모습으로. 그리고 안타깝지만 전혀 완주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그저 그렇게 힘겹게 코스를 따라 걸어가는 마라토너들이 있었다. 미끼씨와 나는 박수를 쳐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마치 우리의 행동이 조롱하는 것 같이 느껴질까 봐. 그러나 우리는 정말 응원해주고 싶었다. 모든 사람이 사람의 인생이 모두 특별한 것처럼, 모든 마라토너의 마라톤도 특별하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 자체가 박수받아야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라톤도 우리 인생도.




인생은 마라톤 같다는 말은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외롭고 힘든 자기만의 싸움이 마라톤과 유사하기 때문임은 알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곳에서 같은 곳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인생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삶과 각자의 길이 있는데, 정해진 코스를 따라 앞만 보고 달려가는 마라톤이 우리의 삶이라면 너무 비참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마라톤은 결국은 경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기는 자와 지는 자가 있는 경쟁.


그런 생각에는 큰 변함이 없지만, 엘리트 마라톤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 뛰는 마라톤을 보니, 마라톤에도 인생의 단면이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항상 인생의 길을 홀로 가는 것 같지만, 늘 우리 곁에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격려와 응원이 있었다. 레이스 중간에 주어지는 물과 간식처럼, 누군가의 도움이 늘 있었고, 진행을 도와주는 스탭, 경찰과 의료진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지원하는 사람들은 늘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누군가로부터 그렇게 격려받고 응원받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런던 마라톤 완주자에겐 메달을 준다. 힘든 마라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냈다는 것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다. 그리고 모두 다 승자라는 사실에도. 세계 신기록을 세우는 엘리트 마라토너들이 아닌, 보통의 마라토너 같은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각자의 삶을 나아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를 존경해야 하지 않을까. 각자의 삶을 열심히, 그리고 묵묵히 달리는 우리 모두는 승자로서의 대접을 받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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