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빠랑 셋 살기
지금의 나는 엄마랑 꼭 붙어 앉아 티브이도 보고 엄마가 친구 만나고 온 이야기를 조곤조곤하는 것도 잘 들어주는 착한 딸이지만 내가 서울에서 부산로 처음 내려왔을 때 온 가족이 가장 걱정했던 건 바로 내가 엄마와 함께 살 수 있을지의 여부였다. 정신없는 고등학교 생활을 졸업하자마자 서울에서 11년을 살았으니 사실상 어른이 되어 부모님과 같이 사는 건 처음이었다. 당연히 옆에서 싸우지 말란다고 안 싸워지는 건 아니었고 대망의 첫 싸움이 크게 있었던 뒤에 오죽하면 아빠가 엄마와 한번 더 싸우면 나를 집에서 쫓아낸다고 으름장을 놓을 정도로 우리 사이는 심각했다. 결국엔 다시 집을 나가서 2년을 따로 살았다. 엄마가 티브이와 냉장고로 나를 꼬셔 다시 같이 살기 시작하 게 이제 2년이 좀 넘었다. 그동안 우리는 베프까진 아니더라도 단둘이 1박으로 여행을 가도 싸우지 않을 정도로 친해졌다.
근본적으로 엄마와 나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 요즘 유행하는 MBTI 방식으로 말하면 엄마는 F, 나는 T형 인간인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엄마가 건강에 좋다는 이유 따위로 뭘 먹으라거나 먹지 말라고 할 때마다 나는 내가 아는 과학적인 지식을 총 동원해 엄마의 말을 반박했다. 엄마가 친구와 있었던 일을 말하면 대뜸 짜증부터 냈다. 아니, 그러니까 그 친구들은 엄마를 이해할 마음이 없다니까? 왜 그런 친구들을 만나는 거야? 나는 항상 엄마와 엄마 주위를 분석하고 비판하고 뭔가를 고쳐주려고 했다.
외가에서 가장 똑똑했지만 장녀였던 우리 엄마는 두 오빠에게 밀려 대학을 가지 못했고 두 동생과 아픈 부모님을 부양하느라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덜컥 결혼을 하고 나와 내 동생을 키워내느라 반 평생을 바쳤다. 엄마에겐 항상 더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지만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자식을 사랑하긴 했지만 더 넓은 곳에서 꿈을 펼쳤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엄마의 자격지심과 낮은 자존감이 제대로 타격받은 건 10년 전 아빠 사업이 망했을 때다. 두 분 앞으로 빚이 쌓였고 엄마는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사업 실패를 겪어보지 않은 나는 너무 오랫동안 힘들어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용카드나 통장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이냐고 무심하게 물었다. 아빠 카드나 내 카드를 쓰면 되는데, 왜 저렇게 술을 마시고 속상하다고 우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나는 닮은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술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중독이다 싶지만 아직은 부정기이고(^^) 아무튼 술을 마셔도 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또 좋아하는 건 엄마와 내가 똑 닮았다. 지금은 건강을 생각해서 술을 많이 줄였지만 한창 힘들었을 때 엄마는 매일 소주를 한 병씩 비웠다. 그리고 아빠를 향해 주사를 부렸다. 사업이 망해서 제일 힘든 건 아빠 본인일 텐데, 나는 아빠가 가엽고 불쌍했다. 그래서 엄마를 더 이해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부산에 내려온 건 두 분이 부동산 일로 자리를 잡으면서 아빠의 사업 실패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을 때다. 엄마가 의외로 부동산 일에 재능을 보여서 집에만 있던 예전보다 훨씬 활기차 보였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집도 사려고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엄마의 신용불량자 문제는 해결이 안 된 상태였고 엄마는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술을 많이 마셨다. 온 가족이 나와 엄마를 걱정할만했다.
나는 우선 나와는 달리 엄마와 잘 대화하는 동생에게 조언을 구했다. 지금 같으면 F식으로 공감해 주라는 말을 동생이 길게 풀어줬다. 엄마가 얘기하면 우선 응, 그렇구나, 하는 식의 리엑션을 먼저 할 것. 조언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말고 엄마의 말을 공감할 것.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협의할 때는 논리적으로 설득하려 하지 말고 엄마의 감정에 호소할 것.
처음에는 그런 식의 대화가 너무 어색했다. 친구에게는 잘도 하는 게 왜 가족, 특히 엄마한테는 안 되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무엇보다 큰 소리 내지 말고 짜증 내지 말 것. 그리하여 출가 허락을 받을 때도 동생과 대본을 짰다. 엄마, 나 이미 30댄데 엄마 아빠랑 같이 살기도 너무 스트레스받으니까 그냥 밖에서 따로 살게요,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게 아무리 내 권리고 자유라는 생각이 들어도 내 맘대로 할게요,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동생의 코칭에 따라 나는 우선 엄마 아빠와 함께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호소했다. 내가 힘들어서 그러니까 나를 이해해 달라고 했다. 나는 솔직히 상황이 이해가 잘 안 되었지만 엄마는 좀 고민하더니 직접 방을 알아봐 주었다. 나는 너무 좋아서 말 그대로 폴짝폴짝 뛰었다.
가장 중요한 건 엄마가 존중받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거였다. 결정권을 엄마에게 줘버리자 많은 게 편해졌다. 내가 반대하던 건 기껏해야 엄마가 먹는 영양제의 종류, 건강에 관한 편견, 약간의 미신 같은 거였다. 그쯤 엄마 하고 싶은데로 놔두자 마음먹고 나니까 별 게 아니게 됐다. 언젠가부터 아빠와 나는 엄마를 회장님이라고 부른다. 반은 장난이지만 반은 진심이다.
그리고 하나 더, 수많은 싸움 끝에 터득한 마지막 규칙은 짜증 나고 화났을 때는 말하지 말고 꼭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주말, 점심을 준비하며 계속해서 짜증을 내는 엄마 때문에 나도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엄마는 그렇게 불러주니까 엄마가 진짜 회장님인 줄 아나 봐! 그럴 거면 밥을 하지 말지 왜 하면서 그렇게 짜증을 내는 거야? 마음속의 말을 달려가서 퍼붓고 싶었다. 근데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나중에 또 상처받은 엄마에게 아깐 그래서 미안해, 하는 상황이 생길 게 뻔했다. 그게 더 싫어서 나는 방에 가만히 누워서 화를 삭였다. 생리 직전이라 예민했는지 화는 잘 풀리지 않았고 몇 번이나 엄마한테 달려가 따져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굳은 표정으로 방에 들어가 그렇게 한참을 방에서 나오지 않자 잠시 후에 엄마가 슬그머니 와서 딸, 짜증내서 미안해,라고 했다. 물론 화가 바로 풀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들을 참기는 참 잘했다 싶었다. 참는 자가 이긴다고 누가 그랬지? 요즘 들어 하는 생각이지만 참, 어른들 말 틀린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