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필름이 끊겨 귀가한 어느 날, 아빠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일주일에 두 번만 술을 마실 것, 어기면 벌금 10만 원. 밤 12시까지 집에 들어올 것, 어기면 벌금 50만 원. 또다시 필름이 끊기면 벌금 200만 원을 책정한 것이다. 이 버릇을 고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나도 선뜻 찬성했다. 에이 설마, 200만 원이나 내는데 고쳐지지 않을까, 부모님 두 분과 나와의 공통적인 바램이었다.
결과는 어땠냐면, 세 달에 걸쳐 3번의 200만 원과 한 번의 50만 원을 냈다. 결국 과음하는 습관은 나아진 게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 술 마시는 것과 통금 시간은 꽤 잘 지키긴 했다. 술에 취하더라도 12시까지는 들어왔기 때문에 와인 동호회 사람들이 나를 신데렐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두어 번은 12시 맞춰 집에 와놓고도 기어이 뒤늦게 술이 올라 아빠 엄마한테 주절주절 주정을 부리고는 또 기억이 못 했다. 내가 좀 취했다 싶은 다음 날 아침이면 아빠가 물어보는 “니 어제 아빠한테 한 말 기억하나?”하는 질문을 했다. 제일 무서운 순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12시까지로 귀가 시간을 정한 만큼 절대적인 음주량이 줄었기 때문에 필름이 끊기더라도 심각한 주사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 앞에 놔둔 보내는 택배를 집 안으로 들고 들어와서 큰소리로 엄마 아빠를 깨운다던가, 엄마한테 한참 뭔가 하소연을 한다던가 하는 일들 때문에 나는 필름이 끊겼다는 걸 아빠한테 매번 들켰고, 총 650만 원이라는 벌금을 내야만 했다.
작년부터 심리 상담을 받고 있는데 상담 선생님은 올해 중반쯤부터는 내가 제일 힘들어하던 무기력을 동반하는 우울증은 거의 호전됐다고 봤다. 내가 원치 않으면 상담을 그만해도 된다고 했는데 나는 음주 습관을 고칠 수 있을 때까지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다. 매번 실패하느라 좌절하는 와중에 선생님은 아빠와의 약속은 참으로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중독을 치료하는 데 가까운 사람들의 도움이 아주 효과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내가 지키지 못하고 냈던 벌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선생님도 걱정이 심해졌다.
정신의학과 선생님은 내가 필름이 끊길 때마다 뇌가 안 좋은 영향을 받는 것을 제일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해서 필름이 끊기면 젊은 나이에 알코올성 치매가 올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뇌세포에 좋은 비타민 B 처방을 추가해서 아침저녁마다 먹게 했다. 이어지던 실패를 이야기하던 어느 날, 문득 나의 모든 단점들이 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모으지 못하고 과소비하는 부분도 전부 와인과 다이닝 때문이고, 덕분에 살찐 것도 못 빼고 있으며, 가장 심각한 필름 끊기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면 결국 연애도 못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던 참이었다. 술만 끊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걸 나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이야기하자 선생님이 그렇다면 한 달 정도만 금주를 해보는 건 어떠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듣자마자 에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장 3주 뒤까지 약속 잡힌 게 있는데 어떻게 금주를 한단 말인가.
근데 며칠 뒤 사무실에 앉아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별안간 한 달 금주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생각이 든 건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한 건 정말 갑작스럽게 든 생각이었다. 그때가 11월 초였는데, 11월 22일에 잡힌 와인 테이스팅 모임은 꼭 가고 싶었기 때문에 그럼 11월 23일부터 12월 22일까지 금주를 하자 싶었다. 아슬아슬하게 크리스마스와 연말 파티는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마음먹은 김에 못을 박아야지 하면서 친한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페이스북에 포스팅을 올렸다. 엄마 아빠에게도 며칠부터 30일 간 금주를 할 것이라고 공표하며 달력에 표시를 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