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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부를 뒤흔드는 것은 누구인가

[3. 나의 일부를 뒤흔드는 것은 누구인가]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속 문장 옆에 인덱스를 한 장 떼어 붙였다.



내 속에 오랫동안 잠들었던 '나의 일부'를 뒤흔들어 깨워 놓는..  ​



노르웨이 숲 주인공은 하쓰미를 보며 이 마음을 느꼈다. 나의 경우 어떠한가.

내 속에 오랫동안 잠들었던 '나의 일부'를 뒤흔들어 깨워놓은 자는 누구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20대 사랑하던 사람도 나의 일부를 뒤흔들어 놨던 것 같고, 면접에서 날 떨어트린 면접관도 잠시지만 나의 일부를 뒤흔들어놨던 것 같다.

나를 뒤흔들어 놓은 사람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떠오르자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아이들이 무언가 할 때 속으로 '아싸 자유다!'를 외치며 내 할 일을 한다. 해야 할 업무가 조금 밀려있더라도 이런 럭키한 시간에는 아무쪼록 절실하게 하고 싶은 무언가를 해야 한다.

재빨리 뜨거운 커피를 한 잔 내려 거실에 커피 향을 솔솔 풍기고 노트북 폴더를 열어 쓰고 있는 글을 한 페이지 써 내려갈 때도 있고, 읽다 만 책들로 눈을 돌려 아무거나 잡아들고 읽기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다 가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너무 갑작스럽게 툭 튀어나와 버리는 눈물버튼이라 나조차 예상이 어렵다는 게 함정이다.

카페에서도, 거실에서도.. 이렇게 불쑥 문장 하나에 눈물이 난다.



" 엄마 어떻게 책을 읽다가 그렇게 바로 울 수가 있어?"

이성적인 둘째 아이는 자꾸 책을 읽다가 눈물 흘리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 내 말이.. 근데 아윤아 너무 먹먹하다."

" 도대체 뭔데?"

" 밥... 밥 이야기인데 말이야.. 흑..."

"응? 밥이 왜?..."



엄마가 되니 아이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보내는 내 시간 속 모든 이야기에 눈물이 난다. 엄마로서 보내는 나의 시간이 타인의 시간인 것처럼 쉽게 타인의 시간이 공감되고 그들의 피곤과 수고로움을 안아주고 싶다. 여자로서 엄마로서 공감되는 과한 오지랖이다.

밥.. 그 애증의 굴레.



혼자 밥을 먹는 아버지의 모습을 문장으로 접할 때는 시아버님이 문득 떠올라 눈물이 찬다.

굽은 관절로 평생을 주방에서 시금치나물을 짜고, 밥을 씻는 노모의 모습을 문장으로 접하면 나도 모르게 우리 엄마가 떠올라 눈물이 찬다.

신발장 정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미친년처럼 뛰어 들어와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쌀통부터 여는 여자의 모습을 문장으로 접하면 내 모습이 떠올라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찬다.

지긋지긋한 밥과의 전쟁 속에서 난 밥 속에 스며들어있는 인류애를 느낀다.

진정한 사랑이자, 벗어버리고 싶지만 죽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지긋지긋한 굴레임을 난 본능적으로 느꼈다.



사 먹으면 맛있는 반찬이 수두룩하다. 맛있는 음식 돈 주고 사 먹는 것 얼마나 편하고 시간을 버는 일인가. 얼마나 현명한 것인가.



그런데 내 몸 어딘가에 깊숙이 짱 박혀있는 밥 해 먹이기에 목숨 거는 DNA가 사라질 생각을 안 한다.



요즘 시험기간을 준비하는 아이와 동일하게 '엄마 시험'모드로 주방에서 살고 있다.

일하고 간식 만들고 밥하고 치우고 다시 밥을 하고 죽을 만들고 다시 냉장고를 뒤지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의 일부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 '애증의 자식들'이 육성으로 튀어나왔다.



따뜻한 밥을 먹는 아이들을 보면 괜히 내가 힘이 난다. 힘들다는 아이들 말에 자꾸 반찬을 고민하게 된다. 친구와 만난다는 말에 맛있는 것 사 먹으라는 말부터 나온다.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음식을 말하면 그 부족한 시간 쪼개고 쪼개 빛의 속도로 만들어 여유롭게 만든 척 내어준다.

아이들에게 내어주는 내 모든 먹거리는 어쩌면 내 인생 나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으로서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 때 늘 아빠엄마가 떠오른다.

그냥 자연스럽게 뭐 드시려나.. 먹을 건 있나.. 생각한다.

아이들을 정신없이 해 먹였던 길고 긴 시간.. 주방으로 가기 지겨울게 뻔한 엄마가 떠오르고,  조촐하게 둘이 앉아 말없이 밥을 먹을 아빠가 떠올라 마음 한편이 늘 불편하다.



하지만 모진 딸은 나의 식구 해 먹이느라 정신없다는 핑계로 잠시 고개를 아이들로 돌려,  아빠 엄마의 식탁에는 질끈 눈을 감아버리기도 한다.



혼자 하는 식사는 얼마나 적막할지 상상이 가면서도 아버님 식사시간을 문득 떠올리기만 할 뿐 전화하며 살뜰히 챙기지는 못하는 모진 며느리다.



나 살기 바쁘다. 내 일하기 버겁다. 내 식구 챙기느라 허리 휜다는 말들로 주방으로 가서 난 또 나의 일부들을 위해 정신없이 움직인다.



나의 일부, 어쩌면 나의 전부.

아이들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된 나의 모습이 얼마나 많은가.  엄마라는 이름으로 하루를 보내며 새롭게 발견한 나의 모습이 얼마나 차고 넘쳤던가.

나조차 모르는 감정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나라는 인간의 실체를 낱낱이 알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한다.



야무지게 간식을 먹고 저녁 메뉴를 묻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최지은이라는 인간이라는 실체를 낱낱이 파악하게 한 사람은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희들을 바라보며 무한히 짝사랑을 한다. 그 속에서 엄마는 나의 일부가 송두리째 흔들린다.

사랑으로 뒤흔들린 것처럼 언젠가 훨훨 독립해 날아갈 너희들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다시 엄마의 인생 일부가 송두리째 휘청거리겠지.

사랑도, 이별도 나의 일부를 송두리째 뒤흔든다. 그리고 애증의 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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