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2. 애매한 사이에서]
엄마는 제3의 성을 가진 생명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내용에는 아줌마라는 이름을 부여받는 순간 더 이상 '여성'이라는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일화들이 이어졌는데 아줌마 영역에 들어온 나는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제3의 성이라니..
언제까지나 상큼 발랄한 무기를 장착하는 무리수를 두겠다는 말은 아니다. 그냥 애매하게라도 아직 청춘 어딘가에 나를 걸쳐 두고 싶은 마음이다.
첫 아이가 어릴 때 유모차를 밀고 걷고 있는데 뒤에서 “ 아줌마! 손수건 떨어졌어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아줌마가 나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얼떨결에 뒤를 돌아본 순간 깨달았다. ‘아, 나였구나.’
지금보다 더 어리고, 덜 여물고, 부끄러운 것도 많던 나는 떨어진 아이 가제 손수건을 결국 줍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상황이 스스로도 이해 안 돼 집에 와 이야기했더니 아줌마가 뭐 어때서?라는 무덤덤한 반응뿐이다. 엄마라면 다를까. 엄마도 아줌마의 터널을 건넌 동지이니.
엄마가 마음을 알아준다. 괜히 아줌마라는 단어가 자신을 아줌마로 규정짓는 것 같다고. 그래서 싫다고. 회사에서 근무할 때는 부모가 만들어준 귀한 이름으로 불리다 어느 순간 이름이 아줌마로 굳어져 버렸다고.
한국 사회에서 아줌마는 단순히 결혼한 중년 여성을 지칭하는 중립적 의미인 동시에
시끄럽다, 억세다, 자기주장이 강하다 같은 느낌과도 연결된다. 지하철에서 몸을 던져 자리를 잡는 ‘아줌마’라던가, 아이를 키우면 억센 아줌마가 된다던가, 오전 시간 여유로운 사람은 카페 안 ‘아줌마’ 무리처럼 표현되는 것들. 사회적 고정관념이 감성까지 침투했다. 아줌마라는 단어에 별생각 없던 나는 이 단어가 왜 부정어처럼 느껴지는지 궁금했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통해 사회적 고정관념이 감성까지 침투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손수건을 줍지 못하고 올 정도로 아줌마라는 단어가 듣기 싫던 그날,
나는 도서관 통합 검색창에 아줌마. 기혼자, 여자, 유부녀, 아주머니 같은 단어들을 넣어 찾아보았다. 세상에 멋진 아줌마들이 도서관 통합검색창에 가득했다. 얼핏 보면 아줌마들의 혁명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누군가는 음식으로, 누군가는 사업으로, 누군가는 공부 또는 독서로.. 세상 곳곳에서 작고 큰 일들을 벌이고 있는 혁명가들이 가득했다. 검색창 스크롤을 내리면서 중년 남자의 성공보다 중년 여성의 성공은 드물고 귀한 것이라 포장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강의시간이 불규칙한 편이라 저녁보다는 새벽이나 오전에 운동할 짬이 나는데 새벽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체리듬상 불가능할 것 같아 주 3회 오전시간 수영강의를 등록했다.
오전 9시에 등록한다고 하니 주부반이라고 알려준다. 모두 주부인 것은 아닐 테지만 9시에 운동이 가능한 사람은 주부로 통칭한다. 주부반에는 남자가 없다. 이름 자체가 주부반이니 등록을 하려다가도 다른 시간을 알아볼 것이다. (정말 남자가 주부역할을 하는 집도 많은 상황이지만) 새벽반은 직장인 반으로 적혀있다. 일하러 나가기 전 부지런하게 새벽 수영을 하는 사람들, 그중 분명 주부가 있을 것이다.
시간에 따라서도 이렇게 통칭되는 이름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사회적 편견에 일조하기 때문이다.
주부는 오전에 여유롭고 밥 하는 저녁에는 바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통칭이 아닐까. 직장인 반과 주부반으로 교묘한 심리적 편 가르기를 하기보다는 오전반 오후반으로 시간적 의미만 전달하는 것이 더 낫다. 아줌마라는 단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상대가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뉘앙스의 표현이 지금처럼 난무할 때는 누구에게나 ‘아줌마’라는 호칭이 달갑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밤이다.
그리고 덧붙여 괜히 느끼는 자격지심일까.. 하는 마음도 드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