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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사이에서

[2. 애매한 사이에서]



엄마는 제3의 성을 가진 생명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내용에는 아줌마라는 이름을 부여받는 순간 더 이상 '여성'이라는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일화들이 이어졌다. 나는 여전히 아줌마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상큼 발랄한 무기를 장착하겠다는 무리수를 두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냥 애매하게라도 아직 청춘 어딘가에 나를 걸쳐두고 싶은 마음이다.



저녁은 강의 때문에 시간이 맞지 않아 아이들이 등교하면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수영을 간다. 등록을 할 때 가장 거슬렸던 것은 주부반이라는 세 글자였다. 나는 주부인데 왜 주부반이라는 글자에 머뭇거리는가. 오전에 운동을 하는 사람은 시간이 여유로운 주부라고 단정 짓는 편견의 잣대에 한 마디 하고 싶었고,

그러면서 그 단어에 움찔하는 모순적인 나 스스로에게도 화가 났다. 결국 나는 오전 주부반에 등록을 했다. 아이들이 크면서 예전보다 나를 위해 생기는 여분의 시간이 늘었다. 운동도 하고, 패션에도 더 신경 쓸 수 있고 사진을 보면 심지어 예전보다 더 젊어진 느낌이다.  그런데 남편은 날 볼 때마다 "오늘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라고 말한다. 가끔 그 질문에 성질이 난다. 한껏 꾸미고 나갔는데 친구가 " 오늘 어디 아파? 얼굴이 안 좋네"라고 말하는 꼴이다. 그러면 순간 고민하게 된다.

' 아프다고 해야 하나, 늙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난 어린아이들 육아할 때보다 훨씬 덜 피곤하다. 놀이터에 안 나가도 되고 7시 댓바람부터 산책 나가지 않아도 된다. 유모차를 끌지 않아도 되고 아기 띠를 안 하니 아직 쓸만한 허리라인도 드러낼 수 있다.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탄력이 사라지면서 피곤한 그늘도 자연스럽게 드리우는 것이겠지만 보이지 않는 에너지와 신체는 아직 쌩쌩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지없이 이건 나의 착각이구나 싶을 때도 있다. 난 아직 괜찮다고 생각했건만 며칠 잠을 늦게 자면 바로 드러나는 얼굴의 칙칙함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도 있다. 에너지가 넘쳐 돌 든 아니든 나이 숫자도 차곡차곡 쌓여왔을 테니 뭔가 애매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마음은 살랑살랑 봄바람인데 세상 한가운데 서있는 나는 아이 둘을 키우는 아줌마인 것이다. 아직 쌩쌩한 것 같은데 갑자기 엄한 곳에서 픽픽 피곤해 쓰러져 버리고 야 마는 애매한 중년인 것이다. 그래서 애매하게라도 걸쳐 살랑대고 싶은 마음에 나는 나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름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오전 주부반 상급반. 내가 수영하는 레인에서 나는 나이가 가장 어린 막내다. 40이 훌쩍 넘은 내가 어리다. 예쁘다. 좋을 때다. 젊음이 최고라는 말을 듣는 처지가 됐다. 가장 고령자인 80 가까운 대선배님은 느긋하게 수영 레인을 돌면서 헉헉거리는 날 토닥여주신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 죽어라 할 필요 없어 뭐든"

명언이다. 운동을 하러 왔으니 죽어라 해서 뽕을 뽑겠다 하던 내 생각이 조급한 발차기와 호흡으로 들킨 것 같았다. 40부터 80까지 다양한 연배가 동지애로 뭉쳐있는 수영장 레인에서 정확한 나이는 의미 없다. 여전히 건강하게 운동을 하러 올 수 있다는 자체가 감사함이고 수영 30년 이상 짬빱으로 긴 호흡 뽐내며 레인을 돈다는 자체가 그들에게는 자부심이다. 연배가 높은 분들이 모여 운동하는 실버반으로 들어가서 운동할 수도 있지만 각자의 레인을 지키는 그들의 마음을 나는 알 것 같다. 애매하지만 그 사이에서 여전히 나를 붙들고 있고 싶은 그 간절한 마음을 나도 알기 때문이다. 멀리 가버리면 이전으로는 영영 돌아가지 못한다는 이 진실의 슬픔은 어쩔 수가 없다.



엄마라는 이름은 참으로 애매하다. 중년이라는 나이 자체도 애매하다. 노인이라는 잣대도 애매하다. 세상에 애매한 사이가 차고 넘친다. 나는 어느 쪽으로 발을 걸쳐볼까 눈치를 보기도 하고 때론 철판을 깔며 엄한 곳에 다리를 걸쳐놓기도 한다. 여자와 아줌마 사이에서 난 애매하게 이리저리 다리를 걸쳐본다.

말도 안 되는 청년이라는 단어와 당연한 중년 사이에서 애매하게 다리를 툭툭 걸쳐보며 간을 본다.

나의 이런 모습에 스스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쪽으로만 나를 내던지기에는  뭔가 마음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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