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3. 나의 일부를 뒤흔드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을 읽다가 문장 옆에 인덱스를 한 장 떼어 붙였다.
내 속에 오랫동안 잠들었던 '나의 일부'를 뒤흔들어 깨워 놓는..
노르웨이 숲 주인공은 하쓰미를 보며 이 감정을 느꼈다.
나는 내 속에 오랫동안 잠들었던 '나의 일부'를 뒤흔들어 깨워놓은 자는 누구일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랑도 나를 흔들었고 이별도 나를 뒤흔들었지만 아픔만큼 내 일부를 뒤흔든 때는 없다. 나에게 결혼과 출산, 육아의 과정은 스스로와 마주하게 된 아픔의 시간이기도 했다. 콩알만한 생명체는 다 컸다고 자만하던 나를 쥐락펴락했고 나는 완벽히 작은 생명에게 ko 당했다. 성숙한 어른의 모습보다는 날것 그대로의 본능이 수시로 튀어나와 나를 당황하게 만든 시간. 나는 그 시간 동안 정체성이 뒤흔들리는 고통을 느꼈다.
나로 인해 또 다른 생명체가 자라나고 있다는 자체가 행복과 경이로움인 동시에 공포와 두려움이다. 내 잘못된 행동 하나가 이 아이에게 전달이 될 수 있다는 자체가 압박이었고 나는 두려웠다. 나는 스스로가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던 셈이다.
감정조절이 힘들었고 수시로 눈물이 쏟아졌으며 밀려오는 우울감을 간신히 밀어내려 연기를 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스스로에게도 생경해 당황스러웠다.
심리학자 칼 융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shadow)는 우리가 억압하고 감추어온 자아의 한 부분을 가리킨다. 사회적 기준에 맞추기 위해 밀어내었던 욕망, 감정, 충동은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다가 때때로 삶의 균열을 통해 깨어나게 되는데, 말 그대로 삶이 뒤흔들리는 것이다.
엄마라는 이름이 생기면서 자동 반사적으로 덧붙여진 허울들이 있다. 엄마니까 이래야해. 좋은 엄마는 이런 거야 같은 것들. 그 범주에서 뭔가 동떨어지면 불안해졌고 조급해졌다.
누군가에게 화가 난 적도 드물었던 것 같다. 그런데 감정조절이 잘 안되니 신체 장기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맞나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이렇게 하면 안되..라고 생각은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내뱉어지는 말과 행동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 난 결국 이런 사람이구나. ’
보기 싫어 외면하고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애써 다시 보고 끌어안을 용기가 필요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융은 그림자를 적이 아닌 내적인 동반자로 받아들였다. 그 그림자와 마주하는 자체가 불편하고 낯설지만 동시에 나를 온전하게 만들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호되게 내적 지진을 겪고 난 뒤 우리는 변이한다. 연두색 매미가 끙끙거리며 나무를 타고 올라 허물을 벗고 나와 햇빛에 몸의 수분을 말리며 살아가기 위한 다음 스텝을 밟는것처럼 그 뒤흔들린 시간은 우리를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아한 탈피란 없다. 고통과 인내의 탈피만이 있을 뿐이다.
나의 일부가 깨어나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새롭게 마주하게 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뒤흔들리는 순간은 새 생명을 부여받는 시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