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심
[1.변심의 나날들]
책임감이라는 단어는 글자가 가지는 그 자체 힘만으로 사람을 단단히 옭아맨다. 感, 느끼다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상당히 주관적인터라 그랬던 것일까. 나에게 책임을 느끼는 마음은 상대적으로 더 크게 느껴졌다. 책임감 있는 아이라는 칭찬을 들으며 자랐다. 책임감 있는 첫째 딸, 책임감 있는 학생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고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 내야 한다. 누군가 힘들어 나가 떨어 지고, 두 손 두 발 들어서 난 이제 그만!을 외칠 때도 끝까지 남아 주어진 일을 해내야만 했던 것. 나에게 책임감은 왠지 모를 두려움이었다. 약속한 일을 해내지 못한다는 건 곧 책임감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사실 난
"하기 싫어요."라는 말을 하지 못했을 뿐이고 " 저는 안 할래요"라는 말을 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내가 시작한 모든 일에 책임을 다한다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책임감 있는 학생이라는 단어보다 소심한 학생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렸는지 모른다. 이 애증의 책임감이라는 단어가 아직 까지 날 따라다닌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어느 순간 본능적으로 견뎌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때론 애잔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쯧쯧. 여전히 묵묵하기만 한 답답한 인간아.'
때론 버티는 자세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멈추더라도, 내가 정한 목표와 방향을 생각하며 끝까지 버텨보는 것은 1인분의 몫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내 작은 세상과의 처절한 약속 같은 것. 그런데 이 책임을 다하는 행위에 즐거움이 가미되면 말이 달라진다. 타인을 위한 책임감이 스스로를 위한 책임감과 집념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나에겐 독서와, 글쓰기, 요리가 대표적인 예이다. 독서는 발견하는 재미를 알게 했다. 독서록이나 시험 준비를 위한 책 읽기가 아닌, 좋은 문장과 좋은 생각을 발견해내는 행위는 금을 캐는 광부의 마음이자, 대어를 잡는 어부의 마음이다. 이 즐거움이 자꾸 나를 책장으로 이끌었고 독서에 책임을 부여했다.
글쓰기는 도전하면서 성취해낸 기쁨이 컸다. 글을 많이 읽다 보면 머릿속에 갖가지 생각들이 뒤엉켜 곧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이 뒤죽박죽 섞인 생각을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것이 글쓰기다. 글쓰기는 나에겐 정리이자, 새로운 영역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매일 문장을 쓰고 다듬어가며 글을 쓰다 보니 어느 순간 책을 내고, 칼럼을 쓰고, 글로 상도 받았다. 이제 소설도 끄적거릴 정도로 두려움이 사라졌다. 쓰기의 영역까지 확장돼 즐거움을 알아버린 이상 나에게 이제 읽기와 쓰기는 내 하루 자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리는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터득한 나에겐 훈련소 같은 것이다. 고민할 생각도, 고칠 시간도 읽기와 쓰기에 비해 부족하다. 배고픈 아이를 위해 무언가 만든다는 것은 상당히 창의적인 일인데, 라면 하나 맛있게 끓여본 적이 없던 나에게 요리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실전에 강해지기 위해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많이 해보는 수밖에.
내 가족 먹는 음식이니 정성과 사랑은 기본으로 늘 넉넉하게 들어가고, 좋은 재료로 감각을 총동원해서 음식을 만들어 먹이기 시작했다.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이니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잠자던 오감이 눈을 뜨고 레시피가 없어도 미각에 의존하며 적절한 간을 맞출 수 있게 된다. 어울리는 재료를 고민하고 미각에 의존해 음식을 만들다 보면 나도 모르게 창의성과 순발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물컹거리는 식감 때문에 내가 잘 먹지 못했던 가지 먹이기, 향 때문에 싫어했던 파프리카 먹이기 등 나만 아는 작은 미션들을 떠올리며 요리를 하고, 미션이 성공하면 혼자 뿌듯해하던 모습도 문득 떠오른다. 주방에서 나는 결국 우당탕탕 늘 무언가 탄생시켰고, 맛있게 먹어주는 가족을 보며 새로운 행복도 알게 됐다. 그러니 요리에도 더 애정이 생길 수 밖에. 울며 겨자 먹기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버티며 소소한 행복과 기쁨을 느끼고 발견하게 되면 책임감은 꽤 그럴싸하게 변한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예전 내 모습이 질책과 손가락질이 겁나 눈물을 숨기고 버티는 지은이라면 지금 여기에는 묵묵히 버티며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 결국 화끈하게 해내 버리는 지은이가 서 있다.
쓴 약이 우리의 병을 치료하듯,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것은 써서 당장이라도 뱉어버리고 싶은 것들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 쓴 시간 들이 이렇게 나를 단단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책임감이 가장 싫었는데, 책임감 덕에 하루를 더 알차게 보내고 행복을 느끼고 있으니..
변심의 나날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