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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상반기 정리

by 단편선

https://youtu.be/MZTcH8JhCjk?si=RcL5CyS8NFTr3cwb


상반기 정리.


일할 게 지나치게 많았다. 이리 쓰면 ‘상타서 뭐가 많이 들어왔나?’ 싶은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런 점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그런 수상이나 이런 것과는 무관하게) 이미 들어와있던 일이 많았다. 주로 작곡가나 음악감독으로서의 일이다. 장편 영화음악을 한 편 끝냈고, 전시 퍼포먼스에서 쓰이는 음악, 어린이 무용단의 공연에서 쓰일 음악의 작업을 얼추 마무리 짓는 과정에 있다. 8월부터는 겨울 초입 쯤 나올 신작 연극음악에 매진해야 한다. (‘음악극’이라는 컨셉 덕분에, 써내야할 분량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온전히 이 일들에만 집중할 수 있으면 조금 나았을 텐데, 공연이 많아지니 발란스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2025년 상반기에는 25번의 공연을 가졌다. 얼추 한 주에 한 번 꼴이다. 공연 준비를 위한 시간도 필요하고, 공연에 쓴 에너지를 다시 충전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그 외 오가는 여러 서류들을 어레인지 할 시간도 필요하고, 공연이 아닌 다른 스케쥴도 있고. 그러다보니 일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연도 일이니까, 일의 절대적인 양이나 가짓수에 비해 활용가능한 시간 자원이 태부족이었다 쓰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결국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작업대에 앉아서 곡 쓰거나 일 하다가 점심 먹고 또 곡 쓰고 일 하고 외부일정 있으면 나갔다 와서 곡 쓰고 일정 없으면 그냥 잠자기 전까지 일 하고. 잠 자고 깨면 그 다음 날 아침부터 또 일하고. 그냥 그런 매일의 연속이었다.


그런 하루들은 종종 진공 포장된 비닐 속에 들어와있는 것처럼 경험된다. 곡을 쓰는 것은, 아무렇게나 그저 기능적으로(SUNO AI를 돌린 것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작업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어쩐지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 그런데 몇 시간 째 기타나 피아노로 의미 없는 모티브들을 연주하고 흘려보내고 있다보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 내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잊는 경우가 태반이어서. 그렇게 매일 무언가 적고 또 무언가를 지우는 것을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적는 양보다 지우는 양이 더 많아져 나 자신마저 조금씩 지우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오늘보다 더 기쁜 날은 남은 생에 많지 않을 것이다”라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에 관해 종종 고민하기도 했다. 물론 부를 때는 언제나 성의를 다 했으나.) (하지만 그 일들이 어느 시점에 마무리가 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지워도 지워도 결국은 뭔가를 적는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이 너무 없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책을 샀다. 하지만 읽지는 못했다. 읽지 못하니 그게 좀 슬펐다. 그래서 5월인가 쯤부터는 대중교통에 타면 그냥 스마트폰을 안 보고 책을 읽던지 생각만 하던지 하기로 했다. 그리고 정치뉴스를 안 보기로 했다. (보고 싶으면 잠자기 전에 한 20분 보면 된다.) 매번 잘 해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권 읽었다. 시도 읽고, 철학 책도 읽고, 물리학 책도 읽고, 그랬다. 그런다고 무슨 대단한 생각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너무 많은 단어들이 한번에 머리에 들어와 되려 어지러운 적도 많았다. 그래도 좋았다. 내가 나를 위해주는 시간을 조금은 가져서.


어제 오후에는 마케팅 하는 분들을 만나뵈었다. 일종의 상담인데,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답답함이 있어서. 1시간 반 정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이야기 나누던 분에게 ‘(지금까지는 비즈니스적으로 정리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냥 직관적으로 내 음악, 그리고 우리 친구들과 하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 말씀을 드린 것은 그 분이 나에 비해 몹시 젊은 분이기 때문이다.)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긍정적인 언급도 있었고, 부정적인 언급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좋거나 나쁜 것으로 경험되지는 않았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혼자 ‘지금 살고 있는 내 삶이 그냥 내게 주어진 삶이라서, 나는 다른 사람의 삶을 살 수가 없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건 어쩐지 조금 위안이 됐다. 저녁에는 같이 사는 사람과 만나 재개봉한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를 보러 갔다. 엔딩 크레딧에서 Yen Town Band / Chara의 사랑의 노래あいのうた가 흐를 때는 조금 울고 싶었다. 자주 흔들리고 번지는 화면을 보며 촬영 참 대단하다 하면서도(촬영도 좋지만 그것을 그렇게 결정하기로 한 디렉터의 판단이 좋다) 나도 이제는 거기서 많이 멀어진 것 같다는,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 거리감은 평온하게 느껴진다.) 같이 사는 사람과 걸으면서 “어차피 한 번 사는 삶이니까, 안 해보는 것보다는 해보고 안 되면 우는 게 낫지”라고 했다.


올해는 떠나보낸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그로부터 오는 허무감이 한동안 컸다. 하반기의 계획이 통째로 어그러졌다. 그간 내가 해온 일들에 대해, 반성적으로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얼마 전에는 한 친구와 4박 5일 간 집에서 합숙하며 작업을 했다. 이전에는 내가 모든 것을 다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냥 조금 내려놓았다. 대신 그냥 같이 시간을 보내며 이것저것 했다. 그래보니 그것도 괜찮았다. 나는 요새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한다. 매일 새로운 생각이 나고, 그걸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다. 또 이걸 다 해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싶지만, 천천히라도 해나가야지. 이제는 더이상 잃고 싶지 않다.


쓰고나니 참 두서가 없네.


마지막으로, 그래도 스스로 자신을 칭찬해보기.


시사인에 음악과 관련된 글을 매달 썼다. 한번도 마감을 어긴 적이 없다. 칭찬해.

집안일을 조금 더 잘하게 되었다. 기왕 잘할거면 많이 잘 하고 싶은데 아직 그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 생애 전반을 통틀어 가장 집안일을 잘 하는 사람이 되었다. 칭찬해.

상당히 무너져있던 일과 생활의 발란스를 다시 맞추어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기왕 다시 맞추는 거) 업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고, 실제로 퍼포먼스가 높아지는 게 체감이 되어 신기하고 좋다. 역시 나는 일잘임. 칭찬해.


한동안 음악 조금 재미없었는데 요새 다시 재미가 돌아오고 있음. 어제는 또 Nemanja Radulović 바이올린 한참 들었네. 30년을 들었는데도 여전히 재밌는 걸 만날 수 있다니. 그래도 음악이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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