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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유청 Apr 25. 2023

D-35

로묘일기 1

2022-11-5


털을 잘라주다가 실수로 살을 건드려서 치료차 병원에 갔다. 그저 가벼운 처치와 간단한 진료를 받으면 될 거라 생각하고 항상 갔던 동물 병원에. 모든 집사가 그렇듯 이사를 하지 않는 이상, 한 병원의 단골이기 때문에 의사쌤의 기분 좋은 환대를 받으며 진료실에 들어가 케이지에서 로이를 꺼냈다. 상처는 다행히 깊지 않았고, 굳이 꿰매는 시술이 아니라도 충분한 상태.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로이의 배를 만져보던 의사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음!”

“왜요? 컨디션이 별로 인가요?”

“배에 들은 게 하나도 없는데 지금...”

“네?”

“대변 오늘 안 봤죠?”

“네! 못 본 지 이틀 정도 됐어요”

“이 상태로 오늘 집에 가면 쇼크 올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네?”

“그러면 오늘 일단 종합검진을 해봅시다. 지금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네! 알겠습니다”     


의사쌤 말로는 뱃속에 거의 아무런 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며칠 화장실을 못 갔는데 변비가 아니라 아예 나올 것이 없는 상태였을 거라고 했다. 하긴 병원에 가기 며칠 전부터 눈에 띄게 사료를 먹는 양이 줄었고 화장실도 못갔으니... 의사쌤에게 “제가 둔감하게 너무 늦게 온 걸까요?”라고 물었다. 하지만 의사는 담담하게 위로하며 자책하지 말라며 치료를 이어갔다. 생각해 보면 궁디팡팡을 해도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을 정도로 힘이 없긴 했었다. 그저 그날의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거라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나이가 17살인 고양이인데, 무얼 믿고 건강을 과신했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검진 결과를 기다렸다.  


검진 결과는 최악이었다. 검진 결과지가 나오기 전에 적당한 농담을 건넸던 의사쌤의 표정은 굳었고 중대한 결심을 이야기하듯 결과지를 설명했다. 전반적으로 건강이 너무 안 좋은 상태이고, 특히 신장 기능이 완전 바닥이라고 했다. 결과지에 찍힌 신장 수치는 4구간에 해당할 정로도 최악의 상태였다. 의사쌤은 신장 수치를 설명하는 자료를 보여주며 4구간의 잔여 기대수명은 35일이라고 말했다. 의학적이고 수치적인 분석이 항상 그대로 현실에 적용되는 건 아니겠지만 시간이 길게 남지 않은 건 확실했다. 그 외에도 여러 설명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저 그날의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거라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나이가 17살인 고양이인데, 무얼 믿고 건강을 과신했는지...


의사쌤 앞에서 태연한 척하면서 꾹꾹 참았던 눈물이 와이프와 전화하다가 터져버렸다. 덩달아 와이프도 엉엉 울고… 그리고 몇 시간 후에 수액을 다 맞은 로이를 데리러 갔다. 다행히 병원에 오기 전보다 확실히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의사쌤은 컨디션이 너무 안 좋은 상태라 지금 약을 처방해도 구토를 할 거라고 했다. 수치적으로만 보면 당장 입원해야 하지만 그러면 가족에게도 로이에게도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만 보내다 갈 거라서 그건 추천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일단 수액을 맞으면서 체중과 체력을 회복한 후에 약 처방을 생각해 보자고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주에 수액을 3회 맞아야 해서 병원 방문 일정을 예약하고 나오며 마음을 굳게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긴 시간이 남지 않은 것 같지만, 맛있는걸 좀 더 먹고 덜 고통스럽게 살다 갈 수 있도록 하루하루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일단 올해만 잘 넘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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