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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언니 Feb 25. 2024

참 무해한 도시, 군산

소도시에 왔다. 한 때는 그토록 서울에서 살고 싶어 했지만.

주파수를 알아채기에 그간 너무 많은 잡음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군산은 참 무해한 도시다. 나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저 있어 준다.



_

여자 혼자 군산에 살러 왔다고 소개하면 돌아오는 반응이 재미있다.


“아니 왜?”

“집에 무슨 일 있어?”

“남자가 일하러 오는 경우는 봤는데…”

“아유…(할말하않)”


여자 혼자 서울에 살러 왔다고 했을 때 그럭저럭 수긍했던 것과는 다르다. 나는 조금 뻘쭘해지지만, 예로부터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가야 한다는 말이 있었으니 마음 쓸 일도 아니다.  


2023년 봄, 군산에 온 지 한 달째이다. 군산 나운동에 살고 영화동에서 일하고 있다. 남편은 서울 관악에서 살고 강남에서 일하고 있다. 이달은 결혼 1주년이었고, 며칠 전 주말에는 군산에서 기념일을 보냈다.


어떠한 연유로 결혼한 여자 혼자 군산에 와 살게 된 걸까. 계획까지는 아니었지만 자발적 선택이었다. 소도시에서 살고 싶어서다.


 때는 서울에서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지방 사람이지만. 

2023.3. 월명공원. 군산에서의 봄은 고장한 안테나를 고치는 시간과도 같았다.


1999년, 전주 효자동.


“효자동에서 태어나서 효자동에서 살다가 효자동에서 생을 마감할래?”


평범하던 어느 날 효자동의 한 중학교 교실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툭 던져진 한마디는 들판에 던져진 불씨 같이 마음속에서 빠르게 번졌다.


‘이게 맞아?’


 늘 보던 거리, 매일 만나는 친구들, 한결같은 동네. 하루하루 안온함이 쌓여가는 가운데 지루함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관심은 점점 동네 바깥으로 향하는데 내가 사는 동네는 어쩌면 하나도 변하지 않는 거 같던지. 전주 효자동 너머에는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동네를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날부로 목표는 인서울. 대학을 서울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부모님은 반대했다. 학비도 비싸고 생활비도 배로 드는 데다 무엇보다 가족을 놔두고 왜 서울로 가냐는 것이다. 나는 생떼를 썼다. 큰 물에 못 가게 막는 것 같아 반발심만 커졌다. 그렇게 부모님의 속을 썪이고 나서야 전주를 뜨게 됐다.


2022년, 서울 관악구.


어쩌다 보니 16년을 이곳에서 대학도 다니고 직장도 다니고, 결혼도 했다. 서울은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쉴 새 없이 자극이 스며드는 도시였다. 다시 전주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향에 간다면 스스로에게 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대학 생활은 방황 그 자체였고 잉여가 되는 기분이 싫어서 졸업 후 바로바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사회생활과 야근을 버티고 버티다 보니 경력이 쌓였고, 어느새 경주마처럼 달리는 일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남산타워와 서울 한복판이 내려다 보이는 멋진 빌딩에서 정장을 입고 사원택을 찍고 출퇴근했다. 커리어우먼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한 달 후에는 깜깜한 밤 불이 훤히 켜진 빌딩을 뒤로하고 집에 가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식사는 주로 외식이나 배달이었다. 방청소조차 힘이 닿지 않아 가사서비스를 맡겼다. 나는 시간과 정성을 들여 남의 일을 하며 돈을 벌고, 그 돈을 써서 내 일상을 남에게 맡기고 있었다.


‘이게 맞아?’ 


뭔가 이상했다. 그간 선택해 온 길에 의심이 생겼다. 정반대의 일을 해보기로 했다. 그간 내 기준에서 무용해 보이는 일, 왜 하는지 모르겠는 일. 쓸데없어 보이던 일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돈을 벌지 않고, 그림만 그렸다. 예술하는 척을 하고 창작을 공부했다.


그리고 곡성에 갔다. 시골에서 아침에는 논두렁을 걸으며 새소리를 들었고 저녁엔 드러누워 쏟아지는 별을 봤다. 소설가, 농부, 셰프, 디자이너, 카페주인, 개발자, 번역가, 화가, 목수, 박사, 사회복지사, 주부… 대도시를 떠나 섬진강에 발길을 멈추게 된 사람들을 만났다.


온몸으로 시골을 느끼면서 ‘왜 대도시를 떠나 시골에 살지?’ 의아함을 담았던 질문은 어떻게 하면 시골에서 살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바뀌어 갔다. 작은 동네에서는 기회를 찾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작았던 것은 나의 세계였다.


한 달 후 서울에 돌아왔을 때, 아파트 숲 일색의 풍경을 더는 참을 수 없게 됐다.


2023년 3월, 군산.


군산의 3월은 유독 춥게 느껴졌다. 바다와 가까워서일까.


살 곳을 골랐다. 대도시보다는 여유롭지만 시골보다는 인프라를 갖춘 곳. 인구 20만 이상 100만 이하의 도시. 일자리가 가장 중요했는데 마침 관심 가는 공고가 난 곳이 군산이었다. 고민이 길어져 좋았던 적이 없었으므로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단숨에 내려왔다.


기왕 온 거 마음이 가는 동네에 머물고 싶었다. 이곳은 웬만하면 차로 15분이면 갈 수 있고 집세도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캐리어 가방 1개를 들고 지곡동, 수송동, 해신동 세 곳에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씩 머물렀다.


한 달 반 만에 원도심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를 계약했다. 은파호수공원이 살짝 보이는 뷰에 한눈에 반했다. 이곳은 한 때 군산의 중심지였지만 신시가지가 생긴 이후 인구가 쑤욱 빠져나간 동네라고 했다. 그런 시간의 흔적과 여백에 마음이 갔다.


퇴근 후에는 매일 호숫가도 산책하고 저녁도 직접 지어먹어보려고 했다. 호기롭게 선언했지만 와서 처음 몇 달은 어색했다. 식습관이나 여가생활 등 서울에서 관성처럼 굳어진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다. 둘이 있다가 혼자 있으려니 쓸쓸하기도 했다.


네 달 즈음이 되자 그냥 받아들이게 됐다. 외로움은 내 그림자 같은 거였다. 길어졌다가 짧아졌다가 했다. 자취를 할 때처럼 내 멋대로 소파에 드러누워 넷플릭스를 질리게 보기도 했다. 심야 영화를 보러 훌쩍 나가기도, 늘어져라 자기도 했다. 늦게까지 안 자기도 했다.


여섯 달 즘 됐다. 빈둥거리는 것조차 지겨워졌다. 일주일 생활패턴은 단순하지만 루틴이 생겼다. 퇴근 후 가볍게 저녁을 먹는다. 일주일 두 번 운동을 한다. 하루는 집 앞 5분 거리의 도서관에서 사서가 큐레이팅해주신 책을 본다. 하루는 동네에서 열리는 문화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주말에는 남편을 만난다. 남편을 만나지 않을 땐 대청소를 하거나 지인을 만난다.


타지에 와 있다 보니 인간관계는 심플하다. 대신 관계의 여백 속에서 온기를 나누는 일이 늘었다. 김밥을 반쯤 남기면 싸주시려고 하는 식당 아주머니, 버스카드를 깜빡 두고 타도 너그러이 태워주시는 버스 기사님, 옥수수를 파는 할머니, 서로 챙겨주는 직장 동료들, 이런저런 일들로 안부를 나누는 사람들이 생겼다.


장거리로 지내는 우리 부부의 관계가 전과 같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섭섭하다. 많은 일상을 공유하는 대신 여행에서 못다 한 얘기들을 나누는 시간이 생겼다. 관계의 거리를 -10부터 +10이라고 하자. 그전에는 서로가 -5안에 침범하듯 있었다면 지금은 0과 +1 사이에 위치한 것 같달까.


나는 이런 일상을 좋아하는 걸까?’ 불안의 시간을 떠올려 보며 자문한다. 대도시에서 일할 때는 150%의 에너지를 쓰고 집에서 겨우 누워 있으면서도, 자기 계발같이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몹시 불안했다. 야근을 하면 내 시간 없이 하루를 보낸 것 같아 화가 났다. 하지만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몰라서 그냥 동동거렸다.


평범하고 편안한 일상, 자극 없는 생활감 속에서 내 목소리를 듣는다. 나의 주파수를 알아채기까지 그간 너무 많은 잡음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동네는 나를 웃기기보다는 내 말을 가만히 잘 들어주는 내향적인 친구 같다. 내가 있는 그대로 있을 수 있게 해 준다.


몇 달 후에는 남편도 군산으로 이사 온다. 모처럼 나의 잔잔한 일상에는 새로운 파동이 일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즐거울 것 같다.





*2023년 3월~11월 동안 군산 책모임에 참여하며 기록한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스쳐 보낼뻔한 군산에서의 이주 첫 해를, 소도시에서 하루하루 일상을 쌓아가는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군산 조각>이라는 책으로 엮었습니다. 지난해 이사 온 저부터 군산에서 나고 자란 이들까지 동네의 작은 책방에서 책 모임으로 만난 15명의 에세이집입니다.  아쉽게도(?) 비매품이라 군산의 작은 책방인 ‘버틀러 북스토어’에서만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놀러 오셔요, 명소 중 하나인 동국사 근처에 위치한 디저트가 아주 맛있는 북카페입니다.

*혹시 책 내용이 궁금하다면 알려주세요. 선착순 세 분께 우편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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