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The Abstraction
커다란 캔버스에 점 하나 그려져 있거나 색으로만 채워져 있는 추상화 앞에 서면 이런 생각부터 든다. '이건 나도 하겠다.' 또는 '이래서 현대미술은 어려워.’
나도 그랬다. 추상화를 보면 감탄보다는 표면적인 색, 형태만 눈에 들어왔다. 더군다나 미술 전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친구와 전시를 보러 가면 나에게 이 작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며 물어봤다. 물론 나도 몰랐다.
이러한 추상화의 난해함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사라졌다. 추상화는 해석의 그림이다. 추상화를 작가 중심의 그림이라고도 하지만 어찌 보면 추상화만큼 관객 중심의 그림은 없을지 모른다. 추상화를 본다는 것은 감정의 받아들임이다. 규정되지 않은 색을, 점을, 선을 감상자가 규정하며 받아들인다. 적어도 나에게 추상화는 그렇다.
감정은 경험 속에서 다양해진다. 예전의 나의 감정의 층의 10층 정도였다면 10대, 20대, 30대를 거치며 20층, 30층으로 많아졌다. 감정의 층이 다양해지면 추상화를 볼 때의 울림은 더 커진다.
예전에 마크 로스코 전시회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캔버스에는 색밖에 없었다. 채도가 낮은 색이 캔버스 천에 스며들었고 크기가 사람 키보다 더 커서 그 그림 앞에 있으면 마음이 경건해졌다. 초등학생 때 와도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까.
미술을 전공하게 되면서 내 작품도 그렇게 변했다. 처음에는 명료한 게 좋았다. 구체적으로 그려낸 대상이 주는 명료한 의미가 좋았고 추상화는 난해한 그림, 말장난에 불과한 그림, 작가의 자아도취적인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이제 나의 그림은 추상화가 되어 갈 것이라고 예상한다. 처음 내가 미술을 시작했던 이유는 그리는 행위가 좋았고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그림이 주는 해석의 여지 때문이었다. 그런 최초의 의도는 미술사를 배우면서 오히려 작가적 소명의식에 사로잡혀서 무시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 그림을 그려서 행복한 이유를 다시금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 이유와 행복을 보는 사람도 느꼈으면 좋겠다. 일상에 여유를 주고 싶다.
미술은 감정의 치유다. 직장의 일은 수치, 이익으로 환산되는 것이라면 그림을 그리는 일은 애매함과 모호함으로 환산되는 감정이다. 이 감정을 잃고 싶지 않다. 즐거운, 행복한, 화나는, 우울한 그 감정 모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