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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초콜릿과 아비투스 (2-7)

2-7. 왜 초콜릿은 아비투스 형성이 어려운가

by 르쇼콜라 아비투스

2부 - 초콜릿과 아비투스

2-7. 왜 초콜릿은 아비투스 형성이 어려운가


초콜릿은 본래 아비투스 형성에 적합한 매개체임에도, 실제로는 교양적 소비로 발전하지 못했다.


대중적 이미지

초콜릿은 여전히 ‘어린이 간식’이나 ‘연인의 선물’이라는 단순한 소비 코드에 갇혀 있다. 달콤함 자체가 초콜릿의 본질로 고정되면서, 초콜릿을 감각적 훈련의 대상이나 취향의 언어로 발전시키는 계기는 차단된다. 결과적으로 초콜릿은 감각을 섬세하게 구별하는 훈련보다는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기호품으로만 소비된다.


이 같은 이미지 형성에는 대중문화와 광고의 영향이 크다. TV 광고 속 초콜릿은 언제나 아이들의 즐거움, 혹은 연인의 달콤한 사랑을 상징하는 도구로만 등장했다. 광고에서 강조되는 것은 원료의 산지나 풍미의 깊이가 아니라 ‘사랑의 메시지’나 ‘즐거운 단맛’이었다. 그 결과 초콜릿은 하나의 미식적 대상이 아니라, 감정적 기호품으로 소비자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또한 초콜릿의 유통 구조 역시 대중적 이미지를 강화했다. 마트와 편의점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값싼 제품들이 초콜릿 시장을 장악하면서, 소비자는 초콜릿을 ‘언제든지 살 수 있는 싸고 달콤한 간식’으로만 인식하게 되었다. 반대로 장인의 정교한 초콜릿은 접근성이 낮고, 가격 대비 특별한 이유를 설명할 언어가 부족해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결국 초콜릿은 와인이나 치즈처럼 세대를 거쳐 문화적 언어로 축적되는 경험을 잃어버렸다. 미묘한 산미와 풍미를 구별하는 훈련은 뿌리내리지 못했고, 초콜릿은 여전히 ‘즉각적 달콤함=초콜릿’이라는 단순화된 코드에 갇혀 있다. 이러한 대중적 이미지는 초콜릿이 교양적 소비로 발전하는 길을 차단하며, 아비투스 형성을 가로막는 중요한 장벽으로 작동한다.



언어의 부재

와인에는 소믈리에 언어가 있고, 커피에는 스페셜티 노트가 있다. ‘블랙 체리의 향’, ‘시트러스의 산미’, ‘풀바디’와 같은 표현은 단순한 맛의 묘사가 아니라, 경험을 공유하고 계층화하는 문화적 장치다. 반면 초콜릿에는 공통된 테이스팅 언어가 거의 없고, 커피나 와인의 용어를 빌려 쓰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언어의 부재는 곧 감각의 기록을 방해한다. 미묘한 맛의 차이를 포착해 언어로 저장하지 못하면, 소비자 사이에 취향의 차이를 공유하거나 논의할 토대가 마련되지 않는다. 즉, 초콜릿을 두고 ‘단맛’과 ‘쓴맛’ 정도로만 표현하는 소비자들의 습관은, 곧 교양적 대화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언어의 빈곤은 단순히 표현의 한계가 아니라, 문화적 권력의 부재이기도 하다. 특정한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곧 그 언어를 해석할 권위와 제도가 있다는 뜻이다. 와인 업계에는 국제 기준의 테이스팅 노트와 소믈리에 협회가 존재하지만, 초콜릿 업계에는 아직 이를 제도화하고 확산할 권력이 미약하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개별적인 경험을 공통의 언어로 변환하지 못하고, 초콜릿은 여전히 ‘개인적 취향의 영역’에 머물게 된다.


결국 취향의 언어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초콜릿은 아비투스를 형성할 기회를 놓친다. 미묘한 풍미의 차이를 구분하고 토론하는 과정은 곧 문화적 자본의 축적이자 교양의 발현인데, 언어가 없으니 이 축적은 시작조차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초콜릿은 ‘경험할 수는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기호품’으로 남으며, 이는 곧 교양적 소비로 발전하지 못하는 가장 큰 구조적 한계가 된다.



브랜드 마케팅의 과잉

오늘날 초콜릿 시장은 경험보다는 화려한 포장과 자극적인 문구가 소비를 주도한다. ‘프리미엄’, ‘세계 3대 초콜릿’ 같은 상투적 표현은 소비자가 실제 풍미를 탐구하기 전에 이미 가치를 선입견으로 규정한다. 소비자는 초콜릿의 본질적 맛을 경험하는 대신, 브랜드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마케팅 과잉은 초콜릿이 지닌 감각적·문화적 잠재력을 오히려 가린다.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원재료와 공정의 차이를 직접 느끼고 기록하는 감각 훈련이지만, 시장은 화려한 패키징과 광고 문구가 감각의 체험을 대체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 초콜릿을 통해 얻는 만족은 ‘풍미의 발견’이 아니라 ‘패키지의 권위’를 소비하는 데서 비롯된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진짜 장인 초콜릿과 가짜 프리미엄의 경계를 흐린다는 점이다. 수십 시간을 들여 카카오를 선별하고 로스팅 한계선을 조율하는 장인의 노력은, 단지 세련된 패키징과 화려한 슬로건 앞에서 대중에게 차별화되지 못한다. 소비자는 결국 ‘비슷한 달콤함인데 더 비싼 제품’이라는 오해를 품게 되고, 고급 수제 초콜릿은 제 가치를 증명할 기회를 잃는다.


나아가 브랜드 마케팅의 과잉은 문화적 언어의 빈곤을 고착화시킨다. 소비자가 풍미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있는 단어를 배우기 전에, 이미 광고 문구가 감각의 자리를 점령한다. ‘벨기에 정통’, ‘이탈리아 장인’ 같은 표면적 수사는 초콜릿을 교양적 기호품으로 끌어올리기보다, 오히려 피상적 소비의 반복으로 묶어둔다.


결국 이는 초콜릿을 하나의 미식적 경험으로 발전시키는 대신, 단순히 ‘프리미엄 이미지’를 소비하는 습관을 강화한다. 이 과정에서 초콜릿은 문화적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며, 아비투스로 발전하지 못하는 악순환 속에 갇히게 된다.



문화권별 위상 비교

이로 인해 초콜릿은 감각을 훈련하기 좋은 매개체이면서도, 동시에 아비투스를 키우기 어렵게 만드는 역설적 지점에 놓여 있다. 흥미로운 점은, 초콜릿이 놓인 위상은 문화권마다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초콜릿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다. 쇼콜라티에와 파티시에의 최고 기술을 집약한 작품으로 여겨지며, 미식가들의 교양 있는 대화 주제로 활용된다. 초콜릿을 맛보고 논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자본으로 작동한다.


스위스에서는 초콜릿이 알프스의 순수함과 정밀한 가공 기술을 상징한다. 멜랑제와 콘체 같은 발명은 단순한 제조법을 넘어 국가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고, 스위스 초콜릿은 곧 ‘정직하고 완벽한 품질’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벨기에는 장인의 손끝에서 빚어진 프랄린과 봉봉이 곧 국가 브랜드로 승화된 대표적 사례다. ‘벨기에 초콜릿’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품질 보증의 상징어가 되었으며, 세계 어디서든 벨기에의 장인정신을 떠올리게 만든다.


반면 한국에서 초콜릿은 여전히 선물 문화와 편의점 소비에 치우쳐 있다. 발렌타인데이나 기념일을 벗어나 초콜릿을 교양적 기호품으로 즐기는 문화는 아직 뿌리내리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초콜릿은 개인의 취향을 표현하는 언어가 되기보다, 특정한 이벤트의 소품으로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대비는 단순히 국가별 취향의 차이가 아니다. 초콜릿이 교양적 소비로 발전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결국 사회적 제도와 문화적 환경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초콜릿이 하나의 아비투스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단순한 ‘맛의 소비’를 넘어, 그것을 해석하고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문법과 사회적 토대가 필요하다.



제도의 후퇴와 구조적 한계

여기에 더해 구조적 한계가 존재한다. 한국은 여전히 초콜릿 후진국이다. 단순히 소비량이 적다는 차원을 넘어, 제도와 규범에서조차 품질 기준을 낮추며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나는 2015년쯤 <다크 초콜릿 스토리>를 집필할 당시, 식품공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당시 규정에 따르면 코코아 고형분 함량이 최소 35% 이상이어야만 초콜릿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이는 본래 유지로 분리되어야 할 코코아버터까지 고형분에 포함시킨 함량으로 국제 기준에 비추어도 낮은 수치였지만, 그래도 준초콜릿으로서의 최소한의 기준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과 5년 뒤 다시 살펴본 식품공전에서는 이 기준이 30%로 낮아져 있었다.1)


이는 단순한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제도가 스스로 품질의 장벽을 허물어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값싼 모방품과 설탕 덩어리가 합법적으로 ‘초콜릿’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고, 소비자들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감각을 기를 기회를 잃었다. 고급 다크 초콜릿이 세계적으로 건강과 문화적 담론 속에서 위상을 높여가던 시기에, 한국은 오히려 ‘질 낮은 초콜릿의 범람’을 제도적으로 허용한 셈이다.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초콜릿은 여전히 ‘간단히 구할 수 있는 달콤한 간식’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소비자의 경험은 깊어지지 못한다. 이는 곧 아비투스 형성의 토대 자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 식품의 기준 및 규격 전부개정고시, 식품의약품안전처 고시 제2016-154호(2016.12.29.), 시행 2018.1.1., 코코아가공품(초콜릿) 기준 개정(35%→30%).
관련 행정예고: 식품의 기준 및 규격 전부개정(안), 식품의약품안전처 공고 제2016-294호(2016.8.2.).



아비투스 형성의 가능성

이 차이는 단순히 시장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아비투스적 소비의 수준을 반영한다. 초콜릿을 교양의 매개체로 끌어올리려면 개별 소비자가 자신의 취향을 언어화하고 이를 공유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초콜릿은 충분히 그 자체로 문화자본을 학습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감각의 미세한 구별 능력은 개인의 지적 자산을 키우고, 취향의 언어화는 타인과의 대화에서 교양으로 작동하며, 맥락적 소비의 자각은 스스로를 하나의 문화적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따라서 초콜릿은 단순한 식품이 아니라, 아비투스 형성과 문화자본 축적을 위한 일종의 ‘실험실’이라 할 수 있다. 작은 한 조각의 풍미를 세밀하게 구별하고, 그것을 언어로 정리하며, 다른 이들과 경험을 나누는 과정은 초콜릿을 통해 교양을 훈련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이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조건과 문화적 환경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테이스팅 언어를 확립하고, 교육 프로그램과 문화 행사를 통해 소비자가 풍미의 다양성을 경험할 기회를 넓혀야 한다. 초콜릿 페스티벌, 테이스팅 클래스, 산지별 비교 시음 같은 장치는 단순한 홍보 이벤트가 아니라, 소비자의 감각을 훈련하는 사회적 장치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제도와 공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소비자 개개인의 인식 전환이 병행되어야 한다. ‘초콜릿은 달콤한 간식’ 이라는 고정관념을 넘어, 그것을 미학적·문화적 체험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소비자의 수준이 높아지면, 기업 역시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 수 없다. 장인적 제작 방식과 투명한 원산지 표기가 자연스레 요구되고, 이는 다시 시장 전체의 질적 상승을 불러온다.


결국 초콜릿은 소비자의 자각 → 제도적 확립 → 시장의 변화라는 순환을 통해 아비투스를 형성할 수 있다. 아직 그 길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작은 차이를 구별하고 공유하려는 시도가 쌓일 때 초콜릿은 비로소 교양적 소비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쇼콜라티에–초콜릿 메이커–소비자 : 간극과 아비투스의 형성

쇼콜라티에, 초콜릿 메이커, 그리고 소비자는 초콜릿을 둘러싼 주요 주체들이지만, 이들 사이에는 단순한 직업적 구분을 넘어 문화적 자본과 아비투스의 차이에서 비롯된 구조적 간극이 존재한다.

여기서 쇼콜라티에(Chocolatier)라는 용어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프랑스 제과 전통 속에서 자리 잡은 장인을 가리킨다. 이들은 커버추어 초콜릿을 사용해 프랄린, 트뤼플, 가나슈 등 완성품을 창조하는 데 집중한다.


반면 초콜릿 메이커(Chocolate Maker)라는 단어는 영어권에서 정착한 개념으로, 카카오빈 자체를 다루며 빈투바 초콜릿을 생산하는 사람을 뜻한다. 즉, 언어적 기원부터가 서로 다른 문화적 아비투스를 반영하는 셈이다.


따라서 쇼콜라티에의 아비투스는 미식과 파티세리 문화, 그리고 미학적 장인정신의 전통에 의해 규정된다. 다시 말해, 이들의 문화적 실천은 ‘재료의 창작’보다 ‘형태와 경험의 디자인’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는 곧 완성품 중심 아비투스라 할 수 있다.


초콜릿 메이커는 카카오빈 자체로부터 출발한다. 로스팅, 그라인딩, 정제, 콘칭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빈투바 초콜릿을 생산하는 이들의 실천은 ‘재료의 기원’을 재정의하는 행위이다. 200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빈투바 운동은 이러한 정체성을 제도화한 문화적 흐름이었다. 한국의 초콜릿 메이커들은 국제 박람회, 해외 연수, 여행 경험을 통해 이 운동을 직접 접하거나, SNS와 특히 유튜브를 통해 해외 초콜릿 메이커들의 활동을 간접 경험하며 학습해왔다. 따라서 이들의 아비투스는 재료의 본질을 탐구하는 생산자라는 의식 속에서 점차 형성되었다.


소비자의 경우, 쇼콜라티에와 초콜릿 메이커의 차이를 충분히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초콜릿에 대한 문화적 아비투스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단계임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소비자의 아비투스 수준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의식의 개선과 학습의 과정이 필요하다. 소비자가 초콜릿의 생산 과정을 이해하고 경험의 층위를 인식하게 될 때, 비로소 초콜릿은 단순한 간식을 넘어 문화적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다.


현재 한국 초콜릿 업계에서 아비투스의 성숙을 보여주는 사례는 제한적이다.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빈투바 강의와 테이스팅 모임은 비교적 활발하지만, 정작 시장의 크기를 좌우하는 일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와 체험은 드물다. 전문가들 사이의 교류와 기술 전수도 물론 중요하지만, 자칫하면 그것은 그들만의 리그로 머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소비자의 아비투스를 어떻게 끌어올리고 이끌어갈 것인가가 핵심이다. 이 부분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한국의 초콜릿 시장은 평생 고립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쇼콜라티에와 초콜릿 메이커를 중심으로 학습과 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와인에서 소믈리에가, 커피에서 바리스타가 아비투스적 언어를 구축했듯이, 초콜릿 역시 전문가 집단이 중심이 되어 담론을 형성하고 소비자의 인식을 함께 끌어올려야 한다. 유럽 현지에서 접할 수 있는 정통 초콜릿 문화는 일부에게 직접적인 체험의 기회가 되었고, 대다수에게는 온라인 콘텐츠와 SNS를 통한 간접 학습의 장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학습은 쇼콜라티에들에게 직업적 자부심과 미학적 감각을 확립할 토대를 제공하며, 초콜릿 메이커들에게는 재료 중심의 관점을 각인시키는 계기로 이어진다. 소비자 또한 해외 여행 경험이나 국내에서 열리는 소규모 테이스팅 행사, 그리고 유튜브를 통한 초콜릿 교육 콘텐츠를 접하면서, 초콜릿을 단순한 선물용 간식을 넘어 자기 정체성을 반영하는 기호품으로 이해할 가능성을 넓혀가고 있다.


브리야 사바랭은 <미식예찬>에서 ‘맛을 이해하는 것은 곧 인간 정신의 성숙을 보여주는 가장 섬세한 징표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피에르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아비투스는 개인의 취향을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이자, 사회적 계층과 문화적 자본의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원리’라 정의했다. 한국의 초콜릿 아비투스 역시 외부 문화를 수입하고, 전문가 집단이 내면화한 뒤, 국내에서 재맥락화하며, 다시 소비자의 인식 전환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성장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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