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아비투스의 단계별 구축
아비투스는 한순간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경험과 언어, 그리고 문화적 맥락이 반복적으로 쌓이며 단계적으로 형성된다. 내가 지난 15년 동안 초콜릿을 기록하고 전하려 했던 여정 또한 결국은 아비투스를 어떻게 구축해 나갈 것인가의 과정이었던 것 같다.
첫 번째 단계는 <다크 초콜릿 스토리>였다. 2016년에 출간한 이 책은 초콜릿을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문화와 교양의 렌즈로 바라보려는 시도였다. 나는 카카오의 발효와 로스팅, 초콜릿의 역사와 사회적 의미를 학술적인 언어로 풀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았다. 이 책은 해외 문물인 초콜릿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지나치게 외국어와 외래어가 난무해서,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는 것을. 초콜릿 아비투스를 이미 가진 업계 쇼콜라티에나 초콜릿 메이커, 소수 마니아에게는 의미 있었을지 몰라도, 초콜릿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언어 자체가 장벽이 되었다. 즉, 나는 심화된 언어로 출발했으나 입문 단계의 언어는 제공하지 못한 셈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웹툰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언어를 낮추고, 이미지를 빌려 서사를 풀어내는 작업이었다. 초콜릿의 풍미나 문화적 맥락은 텍스트로 설명하면 어렵지만, 그림과 짧은 대사로 표현하면 훨씬 직관적이다. 웹툰은 초콜릿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입문 언어’를 제공하는 수단이 된다. 나는 오랫동안 이 작업을 하고 싶었지만, 그림까지 잘 그리는 재능은 없었기에 늘 벽에 부딪혔다. 그림을 잘 그리는 누군가를 만나면 “혹시 이 책을 웹툰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라고 묻곤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모호하거나 확신이 없었다.
상황을 바꾼 것은 챗GPT의 등장이었다. 어렵게 쓰여진 <다크 초콜릿 스토리>를 한 페이지씩 넘겨주면, 그것을 압축하여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주었고, 이미지 생성 도구와 결합하면서 혼자서도 웹툰 형식을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기다림과 의존에서 벗어나 스스로 언어와 이미지를 설계할 수 있게 되자, 나는 비로소 초콜릿의 언어를 입문 단계에서부터 제공할 수 있는 길을 얻게 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미국 플랫폼 연재다. 다만 이는 한국 사회의 아비투스 형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미국은 이미 다양한 빈투바 브랜드와 초콜릿 문화가 자리 잡혀 있어, 초콜릿을 교양적 기호품으로 소비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 연재는 시장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한 ‘테스트 개념’에 가깝다. 내가 만든 언어와 형식이 실제로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하는지를 점검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한국 사회에서의 적용 가능성을 다시 모색하기 위함이다.
특히 앞으로는 한국 시장을 위한 아동용 콘텐츠로의 진출을 고려하고 있다. 초콜릿과 교양을 연결하는 언어는 어린 시절부터 접할 때 더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다. 나 또한 어린 시절 백과 사전 속 초콜릿 이야기나 <먼 나라 이웃 나라> 프랑스 편을 보고 미식의 세계에 입문했는지도 모른다. 아동 독자에게 맞춘 쉽고 친근한 웹툰은, 성인이 되어도 초콜릿을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교양적 기호품으로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미국 연재는 글로벌 무대에서 실험하고 검증하는 과정이고, 한국 진출은 그것을 다시 토착화하여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아비투스는 위에서 아래로 주입되는 지식이 아니라, 단계별로 설계된 언어와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쉽고 가벼운 언어로 시작해, 반복과 공유 속에서 감각이 정교해지고, 결국은 교양과 문화 자본으로 자리 잡는다.
<다크 초콜릿 스토리>가 심화 단계의 언어였다면, 웹툰은 입문 단계의 언어이고, 미국 연재는 그것을 시험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한국 아동용 콘텐츠는, 초콜릿 아비투스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새로운 토양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네 단계를 통해, 아비투스가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직접 경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초콜릿으로 새로운 언어와 교양의 다리를 놓고자 한다.
비록 지금부터 10년이 더 걸릴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