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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초콜릿과 아비투스 (2-9)

2-9. 빈투바는 브리야 사바랭 시대의 초콜릿

by 르쇼콜라 아비투스

2부 - 초콜릿과 아비투스

2-9. 빈투바는 브리야 사바랭 시대의 초콜릿


“정성스럽게 만든 초콜릿은 맛있을 뿐 아니라 건강에 좋은 음식이며, 이는 시간과 경험이라는 위대한 두 스승이 증명한 사실이다.”
장 앙텔름 브리야 사바랭 (Jean 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
미식예찬(La Physiologie du Goût,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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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이 되는 평평한 돌은 메타테(metate), 양손으로 잡고 앞뒤로 문질러 곡식 등을 잘게 부수는 돌은 마노(mano)라고 부른다.



브리야 사바랭 시대의 초콜릿

사바랭이 초콜릿을 ‘건강에 좋은 음식’이라 칭했을 때, 그는 단순히 맛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초콜릿은 카카오빈을 메타테metate 와 마노 mano 로 갈아낸 순수한 형태였으며, 기껏해야 약간의 설탕만 더해진 단순한 조합이었다. 화학적 첨가물, 인공 향료, 안정제 같은 성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대의 초콜릿은 자연 그대로의 카카오가 지닌 힘을 담고 있었고, 이는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활력을 주는 음식이었다. 초콜릿은 귀족과 지식인의 교양 생활 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으며, 사회적 교류와 정체성의 상징으로 작동했다. 즉, 초콜릿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아비투스적 기호품이었다.


또한 메타테와 마노로 카카오를 갈아야 했던 당시의 제작 과정은 강한 체력과 인내를 필요로 했다. 이처럼 ‘힘의 노동’이 요구되었던 배경이 프랑스어에서 초콜릿을 남성 명사 le chocolat로 규정한 문화적 뉘앙스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생산의 주체가 남성이었던 사회적 맥락이 언어적 성별에 투영되었다고 보는 해석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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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 레만이 초기 모델을 개량하여 제작한 멜랑제 - 카카오와 설탕 등의 부재료를 분쇄하고 섞기 위 한 용도로 사용된다.


여기에 주목할 점은, 빈투바 초콜릿을 만들기 위한 가장 기본 장치인 멜랑제 mélangeur 의 등장은 사바랭이 세상을 떠난 직후에 상용화되기 시작했으며, 최초의 바 형태 tablette 초콜릿은 약 20여 년 뒤인 1847년, 영국 프라이 Fry’s 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 따라서 그가 평소 극찬했던 초콜릿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 형태가 아니라, 프랑스 궁정 약사 출신 드보브에 갈레 Debauve & Gallais 가 고안한 피스토르 Pistoles 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피스토르는 본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가 약을 힘들어하자, 드보브가 약제를 섞어 고안한 작은 원형 디스크 형태의 초콜릿에서 비롯되었다. 음료로 녹여 마시거나 그대로 씹어 삼킬 수 있었던 이 초콜릿은 사바랭에게 ‘맛과 건강을 동시에 주는 음식’으로 인식되게 만든 직접적 매개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양의 문제가 아니라, 첨가물 없는 순수 카카오를 통해 몸과 마음의 활력을 길어 올렸다는 사실, 바로 그 경험이 오늘날 빈투바가 지향하는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사바랭이 말한 ‘건강에 좋은 음식’은 결국 한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초콜릿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었던 셈이다.



현대 대량생산과 아비투스의 붕괴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초콜릿은 대량생산 체제에 편입되었다. 저렴한 가격과 대량 소비를 위해 수많은 첨가물이 추가되었고, 긴 성분표가 붙은 가공품으로 변했다. 소비자는 더 이상 초콜릿을 정체성과 교양을 드러내는 음식이 아닌, 달콤한 간식으로만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초콜릿의 아비투스적 성격이 희미해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대량생산은 개인의 취향을 표준화시키고, 집단적 기준에 맞춘 소비는 개인의 정체성 형성을 방해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는 초콜릿은 가격·브랜드·편의성이라는 요소로 선택된다. 그러나 이는 ‘가성비’라는 집단적 잣대이지, 개인의 ‘감성비’와 교양적 소비가 아니다.



빈투바 초콜릿, 아비투스의 회복

이 지점에서 빈투바 초콜릿의 의미가 드러난다. 빈투바는 단순히 새로운 제조 방식이 아니라, 사바랭 시대의 초콜릿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아비투스를 회복하려는 시도다. 산업화 과정에서 초콜릿은 값싼 단맛과 편의성의 이미지에 갇혀버렸지만, 빈투바는 다시금 카카오의 본질로 회귀한다.


카카오빈의 산지와 품종, 재배 방식과 발효 과정을 이해하고, 작은 배치로 로스팅하며, 불필요한 첨가물을 배제하고, 장인의 철학과 미학을 담아낸 초콜릿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경험의 축적물이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는 단순한 맛의 차이를 넘어, 그 뒤에 놓인 농업·생태·역사·문화적 맥락을 함께 체험한다. 따라서 빈투바 초콜릿을 맛본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풍미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교양을 쌓고 세계와 연결되는 자기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빈투바 운동은 또한 소비자 교육의 성격을 띤다. 풍미의 언어를 학습하고,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초콜릿은 ‘간식’에서 ‘교양적 기호품’으로 자리 이동한다. 이는 곧 취향의 언어화를 가능케 하고, 문화적 자본을 쌓아가는 기반이 된다. 소비자가 카카오 원산지와 발효 방식, 로스팅의 뉘앙스를 구분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초콜릿은 더 이상 단순한 단맛이 아니라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결국 빈투바 초콜릿은 미식의 영역을 넘어선다. 그것은 한 개인이 자기 감각을 훈련하고, 사회적 대화 속에서 취향을 공유하며, 더 나아가 문화적 자산을 축적하는 통로다. 다시 말해, 빈투바는 초콜릿을 통해 상실된 아비투스를 되찾고, 새로운 교양의 장(field)을 여는 움직임이다.


아직은 낯선 이름, 그러나 아비투스의 기회

문제는 여전히 많은 소비자들이 빈투바 초콜릿의 존재조차 잘 모른다는 점이다. 값비싼 가격, 낯선 브랜드명, 소규모 생산과 제한된 유통망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편의점과 대형마트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대기업 제품에 익숙한 소비자에게, 빈투바 초콜릿은 ‘비싸고 생소한 무언가’로만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아비투스란 원래 모두가 동시에 체득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대중이 쉽게 접근하지 않는 음식일지라도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미각의 섬세한 차이를 이해하고, 풍미에 담긴 문화적 맥락을 학습한다. 이러한 경험은 단순히 맛의 취향을 넓히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사회적 장 속에서 새로운 교양의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빈투바 초콜릿은 바로 이런 점에서 아비투스 형성의 출발점이 된다. 단순히 ‘먹는 즐거움’을 넘어, 원산지와 생산자의 철학을 이해하고, 작은 차이를 언어로 기록하며, 이를 타인과 나누는 과정은 개인의 정체성과 취향을 정립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다시 말해, 빈투바를 맛본다는 것은 초콜릿이라는 한 기호품을 통해 문화적 자본을 쌓고, 스스로를 교양적 주체로 확장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낯설고 비싸게 느껴질지라도, 빈투바 초콜릿은 한국 사회에서 초콜릿이 단순한 간식을 넘어 교양적 소비로 발전할 수 있는 작은 불씨다. 그 불씨를 어떻게 키워낼지는 소비자와 생산자, 그리고 문화를 해석하는 사회적 환경에 달려 있다.



강의 현장에서 본 아비투스의 탄생

실제로 내가 진행한 강의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빈투바를 처음 접했다. 낯선 경험 앞에서 약간의 어색함과 호기심이 교차했지만, 그 순간이 바로 새로운 취향과 아비투스가 태어나는 지점이었다.

특히 시식 전에 초콜릿 표면에 맺힌 반짝거리는 광택을 보고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단순히 초콜릿을 ‘먹을거리’로 본 것이 아니라, 장인의 손길이 담긴 작품으로 바라본 것이다.

이러한 순간은 소비가 단순한 충족을 넘어 경험과 교양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며, 아비투스가 형성되는 생생한 현장이기도 했다. 빈투바 초콜릿은 바로 이런 경험을 통해 개인의 취향과 정체성을 다시 쌓아 올리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사바랭이 말한 ‘정성스럽게 만든 초콜릿’은 단순히 건강한 간식이 아니라, 교양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음식이었다. 오늘날 빈투바 초콜릿은 이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아주는 열쇠다. 따라서 빈투바는 맛의 영역을 넘어, 개인의 아비투스를 기르는 행위이자 ‘소비를 교양으로 끌어올리는 실천’이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가 남는다.


우리는 빈투바를 단순한 시식 경험으로만 남길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통해 자신의 아비투스를 길러낼 것인가.


이 물음은 곧, 초콜릿을 통해 교양 있는 소비자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향해 우리를 이끌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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