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설렜고, 자주 울었고, 어마어마하게 바빴다.
첫 아이가 3개월 전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동시에 나도 어엿한 초등맘 학부모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막연하게 아이가 초1이 되면 휴직하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타이밍을 놓쳤고 여전히 회사와 육아를 병행하고 있다. 하루 2시간씩 사용할 수 있는 육아시간이 도입되었지만 일상적으로 매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여전한 위태로운 병행이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보상되는 부분이 있으리라 믿으며 버텨볼 뿐이다.
지원한 사립학교에 모두 떨어지고 집앞 학교에 가게 된 아이는 걱정했던 것과 달리 학교에 잘 적응했고 즐겁다고 했다. 아이들이 줄어들고 있는 시대의 공교육은 생각보다 훨씬 훌륭했다. 교실은 쾌적했고, 돌봄은 안정적이었고, 학교 도서관은 마치 키즈카페 같았다. 아이가 학교에 걸어가는 것도 좋았다. 3년 내내 유치원에 버스를 태워 보내면서 뭔지 모를 아쉬움이 있던 터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정 거리를 걸어가는 등교길을 아이가 알게 되는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 아이가 잘 적응해 주는 것이 어찌나 고맙던지. 물론 아이가 잘 지내 다행스러운 것이 첫번째이지만, 내가 안정적으로 출근할 수 있게 해 주어 고마운 마음도 절반쯤 되었다.
동시에 둘째도 2년 반 동안 다닌 어린이집을 떠나 유치원에 들어갔다. 워낙 초반 적응이 힘든 아이인지라 예상은 했지만,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많이 그리고 오래 울었다. 작년까지 언니가 버스 타고 가는 것은 그렇게나 부러워하더니, 막상 본인이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그렇게나 갑작스럽고 어색했나보다. 버스에서 울고 있다는 제보를 다른 엄마들로부터 받을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전에 다니던 어린이집 앞을 피해 다녀야만 했다. 그 앞을 지날 때면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대문 앞에서 울었으니까.. 유치원 일과 시간에도 이유 없이 슬퍼하고 계속 울어서 선생님이 교실 밖으로 나가서 달래고 다시 들어가기를 거의 한 달 넘게 반복했고, 지금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버스를 탈 때면 종종 언짢은 표정이 되어 있곤 한다.
그리고 나는 대학원의 첫 학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 아니면 시기를 아예 놓칠 것 같은 생각이 컸고, 생각만 하면서 계속 미루느니 일단 뭐라도 해 보자는 마음이었는데,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것이 너무나 아쉽긴 했다. 감사하게도 친정엄마랑 시어머니가 아이들 하원을 맡아 주신 덕에 수업도 듣고 팀플도 하고 교류활동도 할 수 있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지만, 일주일에 2~3일은 집에 11시 넘어 들어오게 되었고 아이들 얼굴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번도 못 보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런 날이면 왠지 가슴 한켠이 헛헛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를 반추할 새 없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엄마라는 역할의 공백을 채워 주는 사람들이 갑자기 너무 많아져서 정신이 항상 없었다. 담임선생님 2명, 돌봄선생님 1명, 셔틀선생님 3명, 워킹스쿨 선생님 1명, 학원선생님 6명, 학습지선생님 1명, 양가 할머니 2명, 이렇게 약 16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아이의 하교 시간이나 기타 스케줄이 변경될 때 마다 일일히 그들에게 말을 해 주어야 했다. 다 챙겼겠지 몇 번을 점검해도 그중 안 챙긴 무언가가 나중에 발견됐고 나는 매번 죄송했다. 죄송하다는 말을 반사작용처럼 달고 사는 나날 속에서 우리 가족 세 명의 신학기가 지나갔고, 나를 시작으로 어제까지 모든 이들이 차례로 방학을 했다.
그렇게 여차 저차 살아 내었다. 처음 겪은 우리 모두의 신학기는 내가 상상한 청사진보다 짧게 설렜고, 자주 울었고, 어마어마하게 정신없었다. 다음 학기는 아무래도 뭐든 개선이 필요할 것 같지만, 지금은 일단 생각하지 말고 격려와 칭찬만. “우리 모두 잘 했어. 정말 잘 했다. 이 정도면 무난한 시작이었고, 다음 학기엔 좀더 정비해서 멋지게 보내 보기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