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의별짓 Mar 03. 2024

한량을 꿈꾸는 일개미

뚜렷한 목적에 의한 구체적 계획보다는 즉흥적 결정이었다. 그 당시 나를 둘러싼 감정, 시간, 관계, 여유 등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로 모여 용기가 되었다. 또한, 늘 이유 모를 갈증으로 허덕이던 내게 변화의 계기가 되어줄 거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퇴사를 했고, 한국을 떠났다.


2015.3.2 내 첫 목적지는 미국 오빠네 집이었다. 장시간의 타향살이는 처음이라, 그나마 익숙한 지역에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미국 도착하고 일주일은 거의 동네에만 있었다. 최소 6개월 이상 머물 것을 계획하고 왔기에 급할 게 없었다. 느긋하게 일어나 커피 한잔 마시고, 동네 한 바퀴 돌며, 오고 가는 사람들과 눈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와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졸리면 낮잠도 자고... 넘쳐나는 업무량에 매일 쫓기듯 살던 서울살이와 다른 여유로움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 많아지니 잡생각이 많아졌고, 그 많은 잡생각은 불안감이 되어 버렸다. 무엇에 대한 불안감이었을까?.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24시간 꽉 채운 일상을 보내다 보면, 무언가로부터 나 자신이 쓰임 받고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게 있는데,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사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무작정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빠 아침 출근길에 D.C로 따라 나와 종일 돌아다녔다. 박물관 투어는 기본이요, 웬만해서 올라가지 않는다는 워싱턴 기념탑 전망대도 올라갔다. 심지어, 15년 넘게 미국 살던 오빠네도 처음 들어본다는 지역 축제도 찾아다녔다. 어떻게든 해야 할 일을 매일같이 만들어냈고, 그로 인한 피로감은 불안감을 밀어냈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는 에너지 소비에만 익숙해져 채우는 방법을 잊어버렸던 것 같다. 휴가 때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연락, 길어봐야 2주 남짓한 휴가, 마치 보상받듯 즐기는 꽉 채운 휴가일정. 이런 일상이 익숙한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상이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에 괜찮지 않은 일상의 연속이었던 거다. 결국, 영어학원 등록이라는 일상의 루틴이 만들어지면서,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요즘 들어 그때의 나를 자주 떠올린다. 한량을 꿈꿨지만, 일개미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어, 우왕좌왕했던 나. 눈앞에 놓인 불안감 해소에만 집중해, 그나마 소소하게 있던 여행의 목적, 하고자 했던 일, 사색 같은 건 뒷전으로 미뤄버렸던 나. 여행이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회복하긴 했으나, 달라진 일상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덧 창업 한지 1년이 흘렀다. 1년 전, 나를 둘러싼 상황과 감정, 관계 등 다양한 요소들이 모여 용기를 주었고, 구체적 계획보다는 한번 해보자는 막연한 자신감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냉정한 현실 앞에 난,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불안감 해소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그나마 소소하게 있던 창업의 목적성 마저 희미해져 덤덤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럴 바에 왜 창업을 했을까?' 싶은 생각에 이따금 정신이 번쩍 들다가도, 이상보다는 현실이라는 말 앞에 다시금 고개를 숙인다. 어떻게 현실 앞에 자유로울 수 있을까?.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지만, 멈춤에 있어 많은 것을 내려놔야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내려놓을 준비가 안된 나는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결국 일개미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어쩜 내 삶은 이상과 현실의 반복되는 싸움인 것 같다. 이상을 꿈꾸며 변화를 시도하지만, 결국 현실 앞에 주저앉아 일상을 반복한다. 이 반복된 싸움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일개미 운명이 다하는 순간, 그곳에 그토록 원하던 한량이 펼쳐지기 바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의 여유 되찾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