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 그러니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자고.
한창 일이 재밌던 적이 있었다. 내 소소한 아이디어가 그럴듯한 결과물로 변해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피고름 짜는 듯한 고통 뒤에 찾아오는 짜릿한 쾌감. 아마도 그때, 이 쾌감에 중독됐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삭막한 워커홀릭이 되었다.
삶의 중심이 “일”이었던 워커홀릭이 일을 그만두고 나니, 마치 엄마 잃은 아이처럼 불안해졌다. 번 아웃을 호소하며 여유를 찾고자 어렵게 결정한 퇴사인데, 한 열흘 정도 지났나? 다시금 슬금슬금 일하는 내 모습에 놀랬다. 여행 계획 짜려고 일찍 퇴사했는데, 여행은커녕 내일 당장 회사로 복귀할 것만 같았다.
저녁 이후, 계속 가슴이 답답하다. 조급증이 다시 돋나보다. 어쩜 나는 지금 처해진 회사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식’이란 근사한 포장으로 도망친 건 아닐까?. 유학도 아니고, 그냥 여행 1년 하는 건데, 과연 다시 돌아올 자리가 있을까? - 2015.2.7.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스물둘부터 이어온 사회생활을 한순간 내려놓는다는 게 참 어색하고 불안했다. 예정된 출국일은 더디게 다가오는 것 같았고, 이직 제의와 프리랜서 업무 요청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남들 다 열심히 일하는데, 뭐 대단한 일 했다고 이런 허세를 부리나 싶다가도, 여유 있는 삶을 누리지도 못하고 일에 취해 사는 내가 불쌍하기도 했다.
‘차라리 한국을 빨리 떴으면 나았으려나?’
그렇게 마음의 어수선함이 절정을 이루던 그날 밤, 가장 빠르게 한국을 떠날 수 있는 만만한 항공권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3일 뒤, 나는 삿포로로 떠났다.
한 겨울 삿포로는 그야말로 눈의 왕국이다. 가는 곳마다, 보는 곳마다 온통 하얗다. 하늘에선 심심하면 눈이 내린다. 이제 좀 그쳤나 싶으면, 약 올리듯 다시 내린다. 길을 내기 위해 옆으로 쌓아올린 눈은 내 키를 훌쩍 넘는다. 사람이 사는 곳에 눈이 내리는 건지, 눈이 사는 곳에 사람이 잠시 머물고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때마침 ‘눈 축제 기간’이어서 오도리 공원 길따라 웅장하게 진열된 눈 조각품을 보고 있으며, 자연이 인간에게 영원한 동심을 선물해 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급하게 떠나온 여행인 것만큼 모든 것이 즉흥적이었다. 모든 계획적으로 움직이던 사람이 낯선 땅에서 즉흥적으로 움직이려니 긴장감이 남달랐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계획대로 움직여 보겠다고 신경도 곤두세웠다. 마음 다잡아보려고 떠난 여행에서 오히려 방전될 것 같았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성격인가 보다 싶다가도 왜 이렇게 날카롭게 살아야 하나 짜증 나기도 나고, 참 복잡 미묘했다. 적어도 하코다테 JR 열차를 타기 전까지는 말이다.
삿포로에서 하코다테로 이동하는 당일 늦게 일어나 좌석 예매한 기차를 놓쳤다. 솔직히 처음부터 탑승하기엔 너무 이른 열차였기에, 만약 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탑승하면 감사하고 아님 입석 타야지 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열차를 탑승하는 순간, 늦게 일어난 나를 질책했다. 숨 쉴 공간 없이 사람들로 빼곡히 들어찬 열차 안, 마치 설국열차 꼬리 칸에 타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영화처럼 이런 꽉 막힌 칸에서 몇 년을 살아야 한다면, 나도 목숨 걸고 첫 번째 칸을 향해 돌진할 것 같았다. (지금도 가끔 설국열차를 볼 때면, 하코다테 JR 열차가 생각난다.)
차장 밖으로는 눈 덮인 마을과 드넓은 바다가 제법 조화를 이뤄 괜찮은 풍경울 그리고 있었지만, 저려오는 다리와 갑갑함 앞에서 그 모든게 사치였다. 이 열차 안에 있던 4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 저려오는 다리를 주무르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짜증은 내도, 사람들 타지 말라고 기도를 해도,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들 빨리 내리라고 째려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 떠나고 처음으로 오로지 생존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드디어 하코다테 역! 탈출의 순간이 찾아왔다. 숨 막혔던 열차 속에서 벗어나 하코다테의 개운한 공기를 맡았던 그 순간을 5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감사. 그거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숨 막히는 열차 속에서 지나간 일을 아무리 질책하고 짜증을 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림뿐이었는데, 때가 되면 찾아오는 그 순간을 그냥 기다리면 되는데, 왜 그리 힘들어했을까? 차라리 오는 열차 속에서 아름다운 풍경이나 즐겨보는 여유를 가질걸....’
이때부터였다. 가이드북을 버리고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고, 쉬고 싶을 때 섰다. 눈 떠질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땐 잤다. 나에겐 어떤 계획이나 생각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몸을 맡길 줄 아는 여유가 가장 필요했던 거다.
성공을 향한 초조함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각박했던 나에게 조금 느리게 가도, 힘들게 가도,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면 충분하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안식 여행이 시작되었다.
벌써,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5년이 되었다.
여행을 막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할 때까지만 해도 마음의 여유가 넉넉했는데,
치열한 현실에서 다시금 살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희미해져간다.
2020년 2월, 새롭게 시작한 프로젝트를 잘하고 싶은 마음에 의욕만 앞선다. 그러다 보니, 예전 날카로웠던 못된 습관들이 나타나 섬뜩 놀란다. 이제 겨우,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는 법을 깨달았는데, 단 5년 만에 쾌감이란 중독에 빠져 정작 돌봐야 할 것들을 다시금 잃어버릴까 두렵다.
그럴 때면, 가끔 여행 하코다테 기차 안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괴로워하는 건 그때로 충분해! 갑갑했던 하코다테 기차에서처럼, 모든 게 내 생각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 능력을, 내 노하우를 믿고, 조금만 천천히 여유를 갖고 한 걸음씩 가자. 시간은 늘 내 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