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dfulness Jun 16. 2020

나는 한 번도 간절했던 적이 없었다

[영화] 3: 날씨의 아이

[영화] 3: 날씨의 아이 (Weathering with you, 2019)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언어의 정원, 너의 이름은, 그리고 날씨의 아이까지, 실사와도 같은 영상미가 주는 깊은 곳으로부터의 울림을 가장 큰 매력으로 꼽으려 한다. 마치 현실을 내 눈앞에 구현한 듯한 아름다운 영상미에 빠지다보면, 스크린 속의 한 장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전해주기 때문이다. '언어의 정원'에서 묘사해내던 비오는 날의 공원, '너의 이름은'에서 그려내던 낮과 밤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황혼, 그리고 '날씨의 아이'에서 펼쳐보였던 눈이 부실 정도로 쾌청한 하늘은 아마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분명 최고의 장면으로 손꼽을 것이다. 


빗소리와 풀내음으로 가득한 어느 여름날이 머릿 속에 되살아난다. ⓒ언어의 정원


  관람하기 전부터 스토리보다는 작화의 아름다움에 빠지고 싶었던 마음이 컸기 때문에, 큰 맘 먹고 용산아이파크몰 IMAX 상영관으로 향했다. 사실 재개봉하는 영화인만큼 상영하는 중에 일부 덕(?)들이 과민반응을 한다거나 분위기를 흐리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으나, 다행히도 지금껏 내가 영화관에서 관람했던 영화들 중 가장 성숙한 관람의식을 보여주었다. 중간중간 정적이 흐르는 장면이 3~4번 정도 있었음에도 마치 상영관에 아무도 없는 듯 정적만이 흘러갔다. 덕분에 나 역시 영화 그 자체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고(물론 마스크 때문에 영화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에는 애를 먹었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만이 전해주는 영상미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날씨의 아이'는 집을 떠나 도쿄로 향한 가출소년 '호다카'와 어린 남동생을 홀로 돌보는 맑음 소녀 '히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시 도쿄에는 그치지 않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는데, 히나는 비가 오는 날 맑은 하늘을 드리우게 만드는 능력을 통해 맑음 소녀라는 이름으로 도쿄에서 유명세를 타게 된다. 흐리거나 비가 오는 곳에서 기도를 하면 기적과도 같이 흐린 하늘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토록 기적과도 같은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히나가 하늘과 연결되어있는 무녀(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단어를 차용했습니다)였기 때문이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하늘과 조금씩 동화되던 히나는 결국 온몸이 투명해진 채로 사라지게 되고, '인간 제물'이 되어 도쿄의 비를 멎게 한다. 

폐건물 옥상에서 처음으로 만난 둘.  (출처: 날씨의 아이 스페셜 예고편 한글 자막)


  그 누구도 히나를 기억해주지 않고 도쿄의 날씨가 맑아진 것만을 기억하지만, 유일하게 히나를 그리워하며 다시금 되찾으려 한 호다카의 간절함의 끝에서, 하늘과 하나된 그들은 서로를 마주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날씨의 아이는 나에게 두 가지의 키워드를 던져주었다. 


  "다를 것 없던 일상의 소중함",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간절함"을.


히나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는 듯한 하늘의 모습. ⓒ날씨의 아이



다를 것 없던 일상의 소중함

  

  날씨의 아이는 '날씨'라는 소재를 통해 관객에게 일상에 대한 소중함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한다. 봄과 가을에는 높은 하늘과 함께 선선한 공기가 느껴지는 것을, 여름의 후덥지근함과 겨울의 냉기를 맞이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영화 속 도쿄의 사람들 역시 언젠가는 비가 그칠 것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히나의 존재로 인해 도쿄에는 그치지 않는 비가 연일 계속되었고, 하늘과의 동화가 심화됨에 따라 눈이 내리는 이상기후 현상까지 발생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겠지만 말이다) '오늘은 비가 와도 내일은 해가 뜰 것'이라는 당연한 명제가 깨지는 순간, 도쿄의 사람들 역시 일상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 역시 언젠가부터 흐린 날에는 몸과 마음이 축 처지게 되었고, 그럴때마다 맑은 하늘이 주는 쾌청함이 그리워졌다. 파란 하늘을 그리워하게 될 줄 몰랐던 미세먼지 가득했던 작년 봄, 그리고 미세먼지마저 그리워지게 된 올해의 봄을 지나,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도 소중한 것이었는지 너무나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최근의 모습을 돌이켜보면 '일상적인 것'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종일 우중충한 모습의 도쿄를 그려내고 있다. ⓒ날씨의 아이


  아마도 2020년은 인류 모두에게 일상의 소중함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 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COVID-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멈출 듯 하면서도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일상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당연해졌고,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생겼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우울감을 겪게 되는 현상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코로나19가 현대인들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은 단순히 전염병으로서의 생리적 측면보다 인간 사회에 '불신'과 '불확실함'을 초래했다는 사회측면에서 훨씬 치명적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등교를 하는 것마저 불가능해진 학생들,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업무를 봐야 하는 직장인들, 마음 놓고 문화 생활을 즐길 없게된 모든 현대인들의 마음 속에는 은연중에 타인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 자신,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타인의 가려진 얼굴을 보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마치 현대인들의 파편화된 인간관계를 대외적으로 공표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이상 기후'의 형식으로 발현된 것은 아니지만, 현대 사회에 예고 없이 들이닥친 '팬데믹'은 현대인들에게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다.




누군가를 향한 간절함


  '너의 이름은'부터 이어졌던 간절함의 코드는 날씨의 아이에서도 또 한 번 등장하며, 이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감정선의 하나로 자리잡은 듯 하다. 

  

  누구도 히나의 소멸을 기억해주지 않지만, 유일하게 히나를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사람이 바로 남자주인공 호다카이다. 사회로부터 범법자로 낙인 찍히더라도, 숨을 곳 하나 없는 도망자로서의 삶을 살더라도, 호다카만큼은 끝까지 히나에게 닿기를 간절히 원했다. 우연한 실수로 인해 총기를 소지하게 된 혐의로 수배 되어 결국 경찰에게 감금되었던 호다카는 히나를 찾기 위해 경찰서를 박차고 나와서 히나를 처음 만났던 폐건물 옥상으로 향한다. 옥상에 닿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간절함을 몸소 증명해보였던, 간절한 마음 하나만으로 히나에게 닿을 수 있었던 호다카를 보면서 그가 가졌던 순수한 의지를 반드시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담이지만 히나가 도쿄의 비를 멈추기 위한 '인간 제물'로 바쳐졌다는 것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삶보다 공동체로서의 삶을 중시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현대 사회의 단면, 그 속에 만연한 '마녀사냥'을 '히나의 제물화'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공동체의 행복과 개인의 희생 사이에서 어떤 것을 중시해야 하는지, 나는 어떤 선택을 중시해왔는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 던지게 만들어주었다.

 

한 줄기의 빛이 비추던 폐건물의 옥상의 모습. ⓒ날씨의 아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이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지배했던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내 삶에서 가장 간절했던 적은 언제였던가" 


  나는 지금까지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게 단 한 번도 간절했던 적이 없었다. 번듯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학원에서 시간을 떼우곤 했던 중학생 때도, 내신이나 모의고사 성적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으며 수능에서 크게 실패를 겪었음에도 한 번에 입시 생활을 청산했던 수험생 때도,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절실히 배우게 된 대학생활에서도 '목표를 이루기 위한 간절함'으로 정신을 무장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온실 속의 화초처럼 편하게만 살았던 인생은 아닐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다른 이들에게도 그늘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편했고, 경쟁을 선호하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간절한 마음을 나의 동력으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상대를 위해서 내 마음을 온전히 주어야 했음에도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나의 모든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첫사랑이든 오랜 기간 만났던 사람이든 오랜 여운을 남겼던 사람이든 그 누구에게도 말이다. 나는 내가 진심을 다 해서 무언가를 위해 노력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눈 앞에 놓여진 과업에 충실하는 것에 급급했고, 성격 상 내 앞의 일들을 못 해내는 사람이었던 적은 없었으나,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진심 어린 간절함'으로부터 출발한 사건이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진심으로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려 한 순간, 왠지 모를 공허함이 몰려왔던 것도 괜한 감정이 아니었던 것 같다.  


  뚜렷한 목표의식은 없었음에도 대학생으로서의 나는 무엇이든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했다. 특히 2019년과 2020년의 나는 말이다. 그러나 스물다섯의 봄은 그리 녹록치 않은 것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3월부터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했던 5월까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온전한 정신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지금 나에게 진심으로 간절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보인다. 차분하게, 천천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고독과 외로움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