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라는 직장, 엄마라는 직업, 밤을 까는 업무
최근에는 아나운서들이 나오는 한 유튜브 채널을 좋아한다. 대학생 시절 함께 인턴했던 동생이 대한민국에서 최정상 아나운서의 자리에 올라가있는 모습이 궁금해 인터넷에서 끄적끄적 서치하다가 이 채널을 알게 되었다. 이 채널에는 아나운서들이 직접 제작해서 찍어 나오는 영상들이 올라오는데 요즘에는 그 친구는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이 준연예인 아나운서들의 솔직한 캐릭터, 톡톡 튀는 매력들을 보고있으면 참 재미있다.
밤까기라는 제목을 떡하니 먼저 써놓고 아나운서들의 유튜브 채널이야기로 시작하게 되는 이 글이라니... ㅎ다름이 아니라 나는 그 날 오후, 이 어리고 이쁘고 똑똑하고 똑부러지는 아나운서들을 바라보면서 아이들이 집에 오는 길에 먹을 간식으로 내가 난생 처음 삶아낸 밤을 까고있었다. 이 백개쯤 되는 밤을 깐다는 것이 정말 어마어마한 노력과 시간이 든다는 것은 이걸 전해준 언니로부터 미리 익히 듣고 받은 거였지만, 실제로 경험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밤들을 소금물에 닮가서. 구멍이 있는 벌레먹은 밤들은 골라내고. 밑에 가라앉은 밤벌레들도 다 걸러내고. 그래도 어딘가에서 쓸려나올 밤벌레 시체가 무서워 밤 하나하나 젓가락으로 집어서 냄비에 담고. 인터넷에서 도대체 몇 분 삶는지 찾아내서. 한 냄비에 들어가지 않으니 두냄비에 나눠서. 찜기는 또 하나밖에 없으니 하나는 찌고 하나는 삶아서. 찌고 나서도 또 썩은 밤들을 걸러내는 작업 한번 더. (모든 과정 중에서 가장 힘들고 고되다는 '십자 칼집 내기'는 아예 처음부터 과감히 포기, 시도할 생각도 안했던건 내가 그날 최고로 잘한 결정이었다.) 암튼 이렇게 삶은 밤을 (십자칼집을 내지 않았으므로) 이빨로 깨서 숟가락으로 파먹자니 정말 갑자기 30년 전으로 돌아가 아빠가 신문지를 깔고 밤을 한가득 가져와서 파먹던 나의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난생처음 내가 직접 내 손으로 삶아낸 요 밤 뭉터기(?)를 보며 얼마나 감격스럽고 사랑스러웠는지. ㅎㅎ
그런데 가족은 나말고 셋이나 더 있고, 이 사랑스럽고 (아주) 많은 밤들을 나만 먹을 순 없고.. 그렇다고 어린 나의 딸들은 나처럼 이빨로 물어 숟가락으로 떠먹을수 없으니 어떡해야하나 생각하다가 칼로 까기 시작했다. 유투브채널을 틀어놓고 낄낄대며 보면서 한 한시간을 열심히 깠더니 한 열댓개의 밤이 나오더라. 아, 이 정도면 수퍼에서 단돈 5불에 살수 있는 양이다. 아이들은 3분도 안되서 해치울 것이고 아니, 심지어 이중 몇개는 남기거나 버릴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현타가 왔다. 철저한 자기 관리와 시간 관리를 앞세워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반짝 반짝 빛나는 나의 '후배(?)' 들의 직장생활을 보고 있는 나. 그런 나는 아침에 자고 일어난 모습 그대로 헝크러진 머리에 늘어난 티셔츠와 고무줄 바지를 입고 생산성과 효율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을것만 같은 밤들을 삶아 까고있었다. 나의 온 20대를 바쳐 지향했던 저 삶의 모습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버린 지금의 나의 삶, 나의 모습, 내가 살고 있는 이 곳.....ㅎㅎㅎ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쓰고있는 이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전처럼 이런 나의 모습이 슬프지 않았고, 내 현실이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거다.
내 모습 이대로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아주 뿌듯하고. 감사했다. ㅎㅎㅎㅎㅎ
처음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가 되었을때는 내가 오랜 세월 추구해온 가치들과 내가 평생동안 길러왔던 힘?이 전혀 쓸모없어지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이 느껴졌었다. 심지어 더 이상 내가 주도하고 원하는 삶도 살수 없고 온종일 쉬는날 없이 오로지 아기의 필요와 생활리듬에만 끌려다녀야 했던 삶에 갑자기 맞닥드렸기에 오랜시간 괴로웠고 혼란스러웠고 힘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느새 7년이 지난 지금, 어느새 '나'도 많이 자라고 달라졌나보다. 비록 내 자아는 많이 없어지고 나의 꿈은 쫒을수 없게 되었지만 대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섬길수 있는 시간, 더 넓어진 마음 그리고 이렇게 밤을 삶을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