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작은 의문이 떠올랐다.
이제껏 살면서 가장 많이 마신 음료는 무엇일까.
물을 제외하고 보자면 내게 그것은 아마도 차(茶)일 것이다. 그리고 커피가 근소한 차이로 뒤를 이을 것이다.
3위 아래로는 딱히 확정 짓기 어려워 보인다. 아마 보리차나 옥수수차, 결명자차와 같은ー차는 아니지만 차라고 부르는―물 대용 음료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가 되지 싶다.
녹차, 우롱차, 홍차, 백차, 보이차...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동백나무 속의 차나무에서 딴 잎을 우린 음료를 지칭하는 차(茶). 이러한 차를 나는 매일같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잘 마셔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홍차는 1년에 가볍게 1,000잔 넘게 소비하고 있는 듯싶다(200ml 정도의 찻잔을 한 잔으로 보았을 때). 사실 이것은 전 세계의 기호음료 소비 양상과 견주어 보았을 때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결과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기호음료는 커피 아니었어?'하고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세계 1위의 기호음료 지위는 오랫동안 차가 독차지하고 있으니까. 최근 들어 점차적으로 커피의 소비량이 차를 따라잡는 경향이 보이기도 하지만, 아직은 중국과 인도라는 거대한 차문화 시장이 버티고 있기에 쉽사리 넘어설 수는 없어 보인다.
한국은 '차례'라는 단어가 현대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과는 별개로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 등으로 차를 마시는 문화가 점차적으로 쇠퇴하였고, 근대에 들어서도 미국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성장한 국가이기 때문에 기호음료의 절대적인 입지를 커피가 차지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오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아무튼 한국에서 이처럼 낯선 존재였던 차는 영국이나 중국, 일본 등의 문화를 묘사한 매체를 통해서나 접할 수 있는 문화였고, 매스컴을 통해 포장된 많은 문화들이 그러하듯, 그것의 실제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각인되지 않았나 싶다. 차를 즐긴다고 하면 어쩐지 고상한 척하는 듯한, 그런 이미지 말이다.
내가 차를 처음 접한 것은 10살도 채 되기 전인 오랜 옛날이지만, 나 역시 차를 마시는 행위가 커피를 마시는 행위보다 훨씬 더 고상한 행위라고 스스로도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매체의 영향이었을까? 아니면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일까? 지금에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렸을 때 처음 그것을 접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아무것도 섞지 않은 '스트레이트 티'에 대한 어떠한 강박증 수준의 고집 또한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명문화해 보자면
홍차에 우유를 섞는다=가끔씩이라면 OK
레몬이나 딸기잼 등의 과일이나 혹은 애초에 향을 넣어 제조된 홍차=나쁘지 않지만 가능하면 안 하는 게 낫지
홍차에 설탕 넣기=명명백백한 죄악 행위
마치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넣어 마시는 사람을 은근히 촌스럽다고 깔보는 시선과 비슷한 느낌으로, 순수한 차에 첨가물을 섞는다는 것은 차 본연의 향미를 해치는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달콤한 음료를 마시고 싶으면 주스를 마시지 차를 왜 마시니?
그러나, 내 인생에 있어서 다른 모든 부분과 마찬가지로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자연스레 이러한 아집과도 같은 부분이 점차적으로 유연해지기 시작했다. 까짓 거 다질링 세컨드 플러쉬 혹은 최고급 실론 딤불라라고 할지언정, 그곳에 설탕이나 우유를 못 탈 이유가 과연 있을까? 하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데에는 구체적인 사건이 하나 있긴 있다. 수년 전 음료 업계에서 일했을 때 겪었던 일이다.
시내 중심가까지는 아니었으나 지역의 허브 역할을 하던 상가에 자리 잡은 그 점포는 주변에 버스터미널을 끼고 있었기에 유동인구가 많았으며, 무엇보다 대형 숙박 시설들에서 가까운 위치였기에 외국인들도 자주 드나드는 점포였다. 그곳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딱 보아도 중동 어딘가 혹은 인도에서 온 듯한 외모를 가진 남자 손님이 다질링 티를 주문했던 적이 있다. 좋은 등급의 차는 물론 아니었고 티백에 불과하긴 했지만 어쨌든 당시만 해도 차를 품종별로 나누어 갖추어 놓고 파는 가게는 드물었으므로 그는 제대로 찾아온 셈이었다. 물론 그러한 마이너한 음료를 주문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으므로 나는 선반 구석에 숨어 있는 다질링 티 주머니를 찾느라 애먹었었지만. 그렇게 다질링 티를 만들어(만든다고 해도 티백에 뜨거운 물을 붓는 게 다였지만) 내어 주니 그는 일회용 용기 뚜껑을 열어보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한 마디 건네는 것이다.
"썸 밀크? 플리즈?"
다질링과도 같은 개성적인 향이 강한 차는 특히나 우유 같은 첨가물 없이 스트레이트로 마셔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여겼던 나는, 안 되는 영어를 섞어가며 경고 어린 만류를 시도해 보았다. "어... 벗 써, 디스 이즈 다질링"
그러자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이번에는 서툰 한국어로 대답하는 그.
"알아요, 괜찮아요"
그 사람의 국적이 어디였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내 생각과는 다르게 태생부터 미국인이었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유럽이나 인도인이라고 해서 모두 차에 대해 빠삭하다고는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당시의 나보다는 차 문화에 훨씬 친숙한 사람이었을 것에는 틀림없다. 이방인의 그러한 차 마시는 방식이 내겐 충격까지는 아니었을지언정 꽤 신선하게 느껴졌으며, 그날 집으로 돌아와 찬장 어딘가 처박혀 있던 오래된 다질링 티를 꺼내어(인공적인 가향차를 비롯해 향이 있는 차는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선물 받거나 해서 들어온 가향차들은 유통기한이 지나도록 선반에서 잠들어있기 일쑤였다.) 우유 첨가를 시도해 보았다.
나쁘지 않네.
그러고 보니 설탕과 우유를 잔뜩 넣어 만든 빵이나 과자는 티푸드랍시고 차에 곁들여 잘도 먹어대면서, 왜 차 그 자체에는 금기시했던 것일까. 사람은 스스로를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여기곤 하지만, 이렇게 한 발 물러나 보면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선을 매번 그어 놓고 인생의 장면 장면을 참으로 모순 덩어리로 만들어 놓는 존재인 듯하다. 겨우 기호 식품 하나에서도 이렇듯 다양성에 대한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스스로를 고정관념 속에 가두려 하니까. 인생은 한정적이고, 또 모든 감각은 나이 들수록 그 기능이 떨어지게 마련이므로 가만히 나이만 먹더라도 누릴 수 있는 것들은 점점 줄어드는 법인데. 커피나 차에 설탕을 타 먹는 행위 따위를 은연중에 깔보며 마치 스스로가 다른 사람보다 고상한 사람이라도 된 척 뿌듯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낱 기호를 세련된 교양의 척도쯤으로 혼동하며 살아왔던 내가 참 딱하기까지 하다. 누군가 말했든, 교양의 목적은 미(美)가 아님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스스로를 남들과 구분시키는 것으로 품격이 올라간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선. 살면서 깨닫지 못하고 얼마나 많이 긋고 있을까. 지금도 내가 눈치채지 못한 많은 편견이 모여 내 삶에서 윤기를 앗아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하나라도 더 깨닫고 보다 열린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세상살이가 조금은 더 자유로워질텐데.
최근 실론티를 즐겨 마시게 되었다. 실론은 보통 아쌈에 비해서는 수색이 엷은 편이고 맛 또한 강하지 않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실론의 특징인 향을 가린다는 이유로 밀크티로는 그다지 선호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의외로 평소보다 조금 진하게 우린 실론에 우유 약간과 설탕 반 티스푼을 섞으면 오히려 그 풍미가 확 살아나는 것을 발견했다. 스트레이트 티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즐거움이다. 누군가 나처럼 차 혹은 커피에 설탕을 넣는 행위에 끔찍한 죄악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슬쩍 권해주고 싶다. 딱 설탕 반 티스푼이 당신을 삶의 고집에서부터 자유롭게 해 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 말고 시도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