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를 이유로 외출을 삼간 지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나버린 요즘, 문득 도쿄에서 살던 시절이 떠오른다. 귀국을 앞둔 마지막 겨울을 나는 도쿄 아사가야 상점가에 있는 꽤 비싼 월세의 맨션에서 보내고 있었다. 치과의사 하짱과 가수 지망생 Y군과 함께. 그런데 이 가수 지망생 Y 군이라는 녀석이 내가 그전까지 일본인에 대해 품고 있던 고정관념을 모조리 깨부술 만큼 소란스럽고 에너제틱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새벽 일찍 출근해서 한밤중에 집에 들어올 때까지 있는 약속 없는 약속 만들어가며 한시도 멈추지 않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은 기본에, 단 5초도 침묵을 유지하지 못하고 늘 쉴 새 없이 떠드는 입을 갖추었으며, 덤으로 남들의 갑절은 될 듯한 큰 목소리까지 가진. 인생의 단 한 톨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는 그야말로 대단한 기세를 가진 타입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와는 정반대의 타입의 인간이었다는 이야기다.
교토에서 무작정 도쿄로 상경해 일자리도 구하지 않고 몇 달을 버티던 나는 슬슬 준비해 둔 밑천이 떨어져 가던 참이었고, 귀국까지 최대한 저금을 아끼기 위해 마지막 두 달가량을 거의 집에서 틀어박혀 지냈다. 매일같이 정오를 넘겨 겨우 일어나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서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이나 돌아다니는 게 유일한 소일거리. 당시 개봉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디즈니의 겨울왕국 OST를 끊임없이 듣고 또 들으면서 말이다. 문자 그대로 거지 같았던 일본의 인터넷 환경에 짜증을 느낄 즈음이면 그제야 옷을 주워 입고 역 앞 스타벅스로 나가 오로지 와이파이를 이용하기 위한 목적 하에 라떼 한 잔을 시켜놓고서 오후 시간을 때우고는 했었다. 때는 한겨울이었는 데다 서울보다 훨씬 동쪽에 위치한 도쿄였기에 그렇게 한두 시간 커피를 홀짝거리다 보면 해는 금방 떨어졌고, 곧 퇴근하는 사람들로 역 앞이 북적이기 시작하면 나도 그들을 쫓듯이 나와 역 근처 여러 군데 있는 슈퍼마켓 중에서 아무 데나 들러 저녁 찬거리를 구입해 돌아오거나, 그마저도 귀찮을 땐 오오토야나 규동 집에서 저녁을 해결하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던 것이다.
다시 떠올려 보자니 지금의 삶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모양새다. 좀 엄하게 평가하자면 한량 무지렁이 같은 될 대로 돼라 인생. 만약 부모님이 곁에 있었더라면 등짝이 남아나질 않았을 법한. 그런 표류하는 듯한 삶에 이렇게 지내도 되는 걸까 켕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삶에 내심 만족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삶이란 일상 외의 것들에서 오는 고민과 스트레스라는 것이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고, 한량의 삶이라고 해서 그런 것들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안 하는 삶에 대해 불행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었다.
그렇게 나만의 기준에서 만족스러운 매일을 보내던 나였지만, 그게 Y군에게는 참 못마땅하게 비쳤던 모양이다. 하루가 다르게 잔소리가 느는 게 눈에 띄었으니까.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은 불행 그 자체로 느껴졌다 보다. 나를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생각했을는지도 모르겠다. 밖으로 좀 나가서 돌아다녀 보아라, 곧 귀국하겠지만 그래도 아르바이트를 찾아서 하는 게 어때 등등, 그 큰 목소리로 출근 전에 한바탕 휘몰아치고서는 퇴근 후 나와 마주치자마자 오늘은 어딘가 나갔어? 라고 쏘아대는, 그런 매일이었다. 어느 날은 도쿄 체육관에 억지로 데려간 적도 있고, 또 한 번은 자신이 출연하거나 사회를 맡은 라이브 하우스에 끌고 나간 적도 있다. 물론 언제나 그날뿐이었지만.
아무튼 급기야 Y군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도 타운워크를 뒤져서 내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거침없는 성격답게 '외국인 가능'이라고 쓰여있지도 않은 곳도 아랑곳 않고 차례차례 전화를 돌리면서. 내가 옆에서 그만두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심지어 나에게는 휴대폰을 넘겨주지도 않았다. '사람은 전화 통화 한 번으로 이미지까지 전달되지 않으니까 내게 맡겨 둬'라면서. 그렇게 내 흉내를 내가며 면접 날짜까지 모두 일사천리로 결정. 그런 식으로 또 다음 점포, 또 다음 점포...
그렇게 도내에서 총 세 곳의 면접 약속이 잡혔고, 나는 하릴없이 Y군이 건네 준 스케줄대로 이력서를 준비하여 면접을 보게 되었다. 평소에는 의욕이 없어 보여도 긴장된 상황에서는 말이 많아지는 나. 그 덕분이었을까, 면접은 웬걸 모두 성공적이었고, 세 군데 중에서 무려 두 곳이 연락을 보내왔다. 바라지 않은 결과였다. 그 소식을 들은 Y군의 의기양양한 얼굴도 꼴 보기 싫었음은 물론이고. 그것이 내게 어떠한 오기를 품게 했던 것이었을까. 두 군데의 합격처를 모두 거절하고 나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다시 찾기로 마음먹었다. 현지인의 조력 없이는 물론 잘 구해질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어렵사리 하나 건진 곳이 기치조지의 어느 한식 체인점이었고, 그곳에서 나는 일본 생활 중 최악의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만나지 않았어도 될 사람들과 섞지 않았어도 될 말들로 인해 도쿄 생활의 마지막은 그렇게 큰 상처만을 남긴 채 막을 내렸고,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느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않고 그렇게 도망치듯 일본을 떠났다. Y 군의 눈에는 내가 끝끝내 의지박약 하게도 일을 때려치우고 본국으로 돌아가버린 한심한 녀석으로 비쳤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그저 고요한 겨울을 보내고 평화로운 봄을 맞이하며 귀국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그것을 실현할 수 없게 되자 매우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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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아무리 전염병 시대에 재택근무를 한다 해도 어디는 좀 나가야 하지 않겠냐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혈액형 성격 같은 현대인의 미신 따위는 농담으로도 잘 믿진 않긴 하지만, Y 군도 어머니와 똑같은 B형이었다는 점이 떠오르자 피식 미소가 지어진다.
자의든 타의든, 집에만 있어서 불행한가? 정말 바깥으로 나가서 남들과 어울려야 만족스러운 인생일까?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면, 대답은 도쿄 시절의 나와 변함없다. NO. 세상에는 은둔이 체질적으로 잘 맞는 사람도 많은 법. 그리고 정적인 것은 동적인 것에 대하여 결코 불행하거나 우울한 것이 아니니. 집에서만 지낸다고 그것을 불행하다고 지적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절대로 그렇게 하게 두지 마라. 도쿄 시절에는 주변에 휘둘리느라, 그리고 외국인이라는 입장 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 반년 간을 통해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조금 더 선명하게 와 닿게 된 느낌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대로의 삶이 행복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들, 어머니의 걱정은 삶에 대한 개인적인 방침과는 별개의 일. 자식을 향한 잔소리는 성격의 어긋남이나 불만에서가 아닌 애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바깥 산책을 하루 일과에 포함시켜야 하겠다. 마침 운동 부족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는 점도 있고. 딱 이맘때 비 갠 하늘의 저녁놀을 바라보며 걷는 산책길은 놓치면 아까울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