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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Jan 18. 2020

1월 어느 날

이사 후 별다른 일정도 잡지 않은 채 집에서 쉬고만 있는 매일. 그 날 이후로 내가 얻은 것은 자유라기보다는 평화에 가깝다. 언젠가는 기억 언저리에서조차 사라져 버릴 대단치도 않은 사건이지만, 작년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것만큼은 확실한 듯하다. 터닝 포인트. 사실 그렇게 거창한 딱지를 붙이려면 그 이후로의 삶은 어쨌든 그전과는 다른 방향성을 보였어야 할 텐데. 아직은 그 실마리를 찾지 못한 나. 냉기가 스며드는 새 방구석에서 차렵이불 두 채와 덩어리 져 있을 뿐.


책장에서 옛 앨범들을 꺼내 뒤적거리다 외삼촌의 오래된 사진을 발견했다. 경기중학교 입시용 카드에 붙은 증명사진.

사진 속 삼촌의 야무지게 다문 입술과 똘망똘망한 눈망울은 그야말로 삶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있는 듯하다.

나도 이런 표정 지을 수 있었는데.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렸지?


스스로의 직관보다는 이끌림에 매혹되어 행동을 결정하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결단력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는 뜻도 될 텐데.


'소통'을 최소화하려는 올해지만, 사람이란 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싫어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게 마련. 날 보고파하는 이가 이 세상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위안을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실패의 반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마음속에 자라고 있다.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는 불편함이라는 고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다들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듯하다. 모두들 돈을 열심히 벌고, 호감이 있는(혹은 그렇다고 믿는) 이들과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고, 나와 의견이든 수준이든 취향이든 맞지 않다고 생각되는 이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경멸의 시선을 보낸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한 줌의 평화의 가치는 얼마인가요.


돈도 딱히 벌 생각이 없고, 아무와도 친해지려 하지 않으며, 딱히 적이라고 할 만한 대상도 없는 사람은 사회성이 결여된 인간일까. 좀처럼 무엇에도 애착을 갖기 어렵고, 누군가를 증오할 만큼의 에너지도 생기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새로운 무엇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허튼 기대를 품고 매주 바깥으로 돌아다니던 이십대 시절의 거리에 이제는 낄 자신이 없다.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다는 말을 난 좋아하지 않지만, 아주 틀린 소리도 아닌 법. 모든 것은 잠시 빌려 쓰는 것일 뿐. 조금 더 힘썼으면 희망을 찾아냈을지도 몰랐던 그 거리의 주인이 이제는 바뀌었다. 어디를 찾아도 어색함만 느낄 뿐. 내 자리가 아닌 것이다.


자주 한국을 찾는 도쿄의 지인이 교토산 쿠조네기 과자를 사 왔다면서 나갈 의욕이 없는 나를 자꾸 보챈다. 주말이라고 딱히 할 일도 없기는 한데. 왜 이렇게 바깥으로 나가기가 귀찮은 것인지. 십 년을 넘게 매일같이 출근했었지만, 일 년이 채 안 되는 기간동안에 이미 칩거의 타성에 젖어버렸다. 타고난 성향이란 것은 이렇듯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쿠조네기라니. 조금 구미가 당긴다. 친구라 부를 만큼 막역한 사이가 아닌데도, 언제부턴가 내 취향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그. 어쩌면 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잘 드러내는 타입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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