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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Dec 06. 2020

도대체 탈력이 뭔데?

피아니스트의 팔은 시체와도 같아야 해요. 견갑골부터 손목까지 완벽하게 힘을 뺀 상태에서 손끝에만 힘을 싣고 중력만을 이용해서 건반을 치는 거예요. 


꽤 많은 피아니스트나 혹은 피아노와 관련된 직종을 가진 분들이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그러하다고 굳게 믿고 있고, 또 널리 전파하고 있는 이야기. 피아노를 공부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바로 '탈력'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면 너무나도 이상야릇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완벽하게 힘을 뺀 상태에서 건반을 친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어디 두 손을 건반에 올린 채로 '시체처럼' 모든 힘을 쫙 빼 볼까. 곧장 손바닥은 지지할 곳을 잃고 건반에 꽝 떨어지고, 흰건반을 훑고 지나서는 아래를 향해 미끄러져 떨어지고 만다. 당연한 일이다. 팔이란 것은 우리 몸통 쪽을 향해 붙어있고, 지구에는 중력이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론 지구에 있는 어떠한 물체도 이 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피아니스트는 우리 우주의 물리법칙을 거부하는 초능력이라도 갖추고 있다는 말인가?

시체처럼 모든 힘을 뺀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힘이 손가락을 들었다 놨다 해주기라도 한다는 소리일까? 

물론 그럴리는 없다. 그들이 말하는 '모든 힘을 뺀 상태'란 사실은 '피아노를 치기 위한 최소한의 미세한 힘을 컨트롤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므로.


사실 대부분의 피아니스트들은 늦어도 10세가 되기 이전부터(이른 경우라면 5세가 되기도 전에) 피아노를 만져온 사람들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손가락의 독립이 스스로에게 가능할 거의 최대한의 수준으로 완성되었고, 거기까지 이르기 위한 과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의식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과정이 아니므로,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겠으나.


그렇게 훌륭하게 성장한 피아니스트가


'선생님, 선생님처럼 피아노를 자연스럽게 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와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해 보자,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연주 모습을 꼼꼼히 살펴보고, 또 돌이켜보며 생각할 것이다. 


'음, 내가 자세히 보니까, 건반을 연주할 때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아. 옳거니! 피아노란 팔의 힘을 모조리 뺀 상태에서 연주하는 것이로구나!'


저 유명한 '시체 팔 메소드...' 탄생의 순간이다.


우스개를 섞어 말했지만 사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 과정임에는 틀림없다. (대단한 오해이긴 해도) 

앞서 말했듯이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정교한 힘 조절을 통해 피아노를 연주하게끔 아주 어릴 때부터 훈련되어왔으니까. 이를테면 평균적인 인간의 손가락이 낼 수 있는 최대의 힘을 수치화하여 100이라고 친다면, 일반인들은 11-57-98 등등 마구잡이 몇 단계로 겨우 구분하여 낼 수 있는 힘을(그것도 매번 들쭉날쭉하고 오류가 많은 아웃풋으로), 피아니스트라면 능히 1,2,3,4,5... 이렇게 세분하여 배분하는 능력을 자기도 모르게 체득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피아니스트들 본인들로서도 평소에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그들 입장에서는 예를 들어 '30'만큼의 힘이 필요한 구간에서는 자연스럽게 딱 '30' 정도의 힘만 들이게 되므로, 힘의 군더더기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즉, 모든 힘이 빠져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상태)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상태가 바로 우리 모두가 그토록 원하고 궁금해하는 탈력의 상태다.

즉, 탈력=모든 힘을 뺀 상태 (x) 불필요한 힘의 군더더기가 배제된 상태 (o)


자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이놈의 '탈력'을 우리 같은 초보들은 어떻게 얻어야 한단 말인가?


①피아노를 배우는 사람에게 필수적인 키 아이템인 '탈력'은 능히 사전에 완벽 장착하고 나서 피아노 앞에 임해야 하므로, 의식적인 힘 빼기, 일어서서 팔 떨어뜨리기, 연주 중에 느닷없이 옆에서 팔 치기, fff & presto로 하농을 완곡해서 미리 힘 빼기 등등을 통해 얻는다.


②탈력은 기본 소양이 아니다. 오랜 기간 피아노를 꾸준히 쳐 온 사람이 마침내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궁극의 상태일 뿐이다. 즉, '어떻게 얻느냐'가 아닌, '언제 도달하느냐'의 문제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이것을 ①번으로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당장 유튜브 등 피아노 연주 팁 영상을 올리는 몇몇 채널에서도 ①에서 말한 사전 연습 등을 매일 루틴에 넣기를 자신 있게 권하고 있으니까. (이러한 준비 운동 등이 100%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탈력을 위해서는 그냥 보통의 연습을 꾸준히 지속하는 것에 비해 특별히 더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견해)


탈력이란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기초 장비 따위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인간의 몸은 수없는 반복을 통해 가장 효율적이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체득하게 되어있다.

그 큰 증거는 우리가 이족보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발로 가만히 서 있거나, 또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작업인지 우리는 쉽게 깨닫지 못하지만, 걸음마를 막 배우는 아기들을 자세히 관찰해 본다거나, 이족보행 로봇을 구현하는 것이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지 생각해 본다면 답이 나올 것이다.


피아노도 마찬가지다. 걸음마 단계의 아기와도 같은 우리는 무턱대고 자유롭게 이족 보행하는 어른들을 흉내 낼 수 없다. 아니, 절대로 흉내 내어서는 안 된다. 식탁 다리에 지탱해 막 힘겹게 일어서려 하는 아기에게 갑자기 100미터 스프린트를 요구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므로. 불가능할뿐더러, 다치기 십상이다.


탈력이란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피아노를 치면서 내 몸이 건반을 치는 행위를 '자연스러운 인체의 동작 중 하나'의 카테고리로 인식했을 때 체득되는 선물과도 같은 상태인 것이다. 이 체득이란 우리의 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소위 '탈력을 위한 준비운동'과 같은 것의 효용이 글쎄올시다라는 것. 걸음마 아기를 위해 보행기가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와도 비슷한 논쟁일 듯하다. 분명한 것은, 보행기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들이 걸음마를 못 배우는 일은 없다는 것. (오히려 보행기를 쓰는 것이 걸음마에 방해가 될뿐더러 척추 성장 등 신체 발달에 이상을 일으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피아노를 조금만 오래 치면 손이 아프다고? 아르페지오를 치기만 하면 손목에 힘이 들어가고, 스케일을 치면 4번 5번 손가락이 경직된다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익숙하지 않은 행동을 할 때 근육과 신경이 긴장하는 것은 당연하니까. 아무리 의식해서 긴장되지 않은 척, 힘들이지 않는 척, 시체인 척!! 해 본들 탈력 상태에는 절대로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 애초에 접근 방향이 틀린 것이다.


오래전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 씨가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진행자의 질문에 대답한 적이 있다.

도대체 공중에서 어떻게 세 바퀴를 돌 수 있나요? >>> 모르겠어요. 그냥 돌아지던데요?


탈력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본다. 

피아노를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치나요? >>> 모르겠어요. 그냥 힘이 안 들어가던데요?


물론 성인이 되어 취미로 피아노를 시작한 나 같은 사람이 그 경지에 쉽게 오를 수 있을 리는 만무하지만 말이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필요한 것은 연습인 것이다.

과연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를 저 먼 고지를 향한 지루하고도 긴 연습. 단 한두해 가지고는 결코 도달할 수 없을. 


아, 그러나 그 고지에 쉽게 도달하게 할 프리패스는 없을지언정, 약간의 응원군 같은 것이 존재하기는 하다. 

그중 한 가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 바로 '올바른 자세'. 사실 피아노 초보자가 기본으로 갖추고 들어가야 하는 필수 아이템은 '탈력'이 아니라 바로 이 '올바른 자세' 딱 한 가지다. (어쩌면 올바른 자세라는 기본기의 궁극적인 표현형이 바로 탈력일 수도 있겠다만)


나머지 한 가지는 엑서사이즈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것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말해볼까 한다.


그럼, 독학 피아노를 응원하며.

오늘도 피아노 뚜껑을 한 번도 열지 않은 나를 반성하며, 글을 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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