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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Jan 02. 2021

취미생은 어떤 피아노를 살까

피아노를 시작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고민해봐야 할 문제. 


어떤 악기를 사는 것이 좋을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피아노라는 악기의 선택폭 자체가 좁았다. 기업규모의 수입품도 변변찮던 시절에 개인 수입이 가능한 루트가 있었는지조차 불명이지만, 설령 그런 루트가 있다고 하더라도 가정집에서는 결국 영창이나 삼익, 혹은 대우(놀랍게도 그 시대 대우는 피아노를 만들었었다)사에서 만든 국산 피아노를 구매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으니까. 진정한 의미의 디지털피아노는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에서도 아직 대중화되기 전이었으니, 웬만한 대중은 그런 물건이 있는지조차 몰랐었고 말이다.


게다가 이미 80년대 혹은 그전부터 전국적으로 붐이었던 피아노의 대중화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당시에는 '층간소음'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고, 따라서 아파트에 살면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연주라기보다는 소음에 가까운) 소리를 낸들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는 한밤중에도 말이다. 그러니 피아노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어쿠스틱 업라이트 피아노를 구매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보통 사람들의 주거 환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다세대주택에서 변하지 않았지만, 이웃에 대한 기본 스탠스는 많이 변한 듯하다. 이제는 웬만한 용자가 아니고서야 아파트에 살면서 어쿠스틱 피아노를 집안에 들여놓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시대니까. 혹은 비싼 돈을 들여 방음 시설을 갖춰 놓고, 그나마도 평일 대낮에나 마음 졸여가며 연주하든가. 


이러한 시대적인 이유로, 이제는 전공자까지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피아노 구입을 할 때 1순위로 디지털피아노를 고려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난생처음 디지털피아노를 구매하기로 결정한 취미생이라면 과연 어떤 모델을 사면 좋을까.


여유가 있다면, 당대의 하이엔드급 모델을 구매하는 것이 물론 가장 좋다. 야마하, 가와이, 카시오, 롤랜드 등 어떤 메이커에서든 최신의 하이엔드급 모델을 선택하면 예외 없이 만족할만한 성능을 발휘해 줄 것이므로.

그러나 이러한 제품군은 보통 500만 원 혹은 그 이상의 가격대에 형성되어 있으므로, 초보자가 선뜻 구매하기에는 부담이 크다. 특히 스스로가 피아노에 소질이 있는지 없는지, 1년 이상 꾸준히 지속할지 여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러한 금액을 투자하는 것은 모험이니까. 게다가 디지털피아노라는 악기는 아쉽게도 그다지 수명이 길지 않다. 보통 5년 이상 쓰면 초기 상태에서 많이 열화 된다고 보면 된다.(평균 5년이면 기술의 발달로 훨씬 좋은 성능의 모델이 슬슬 나올 시기이기도 하고) 덧붙여서 한국에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 디지털피아노라는 악기의 보증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사실도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눈을 좀 낮춰보자면 200만 원대~ 정도의 중간 가격대의 모델이 있을 텐데, 이 가격대의 모델은 가장 많은 제품군을 형성하고 있기도 하고, 또 수요도 가장 많기 때문에 초보자라면 더더욱 결정에 혼란이 오게 된다. 하루 이틀 알아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어떤 모델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 또, 말이 200만 원이지, 초보 취미생의 첫 투자로는 여전히 고액인 것도 사실. 게다가 이 가격대의 모델에는 소위 '함정'모델이라는 것도 다수 존재한다! 실질적인 건반이나 스피커, 페달 등의 사양보다는 그저 외관+메이커 값으로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는 괘씸한 모델들 말이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처음 배우는 취미생이라면 100만 원대 내외의 '오로지 건반에 올인한 제품'을 추천한다.(열악한 스피커는 5만 원대 이상의 쓸만한 헤드폰으로 어느 정도 해결 가능하고, 페달의 경우 초보자에게는 기본 기능만 있어도 아직은 충분하다) 혹은, 이러한 모델의 중고품도 괜찮다. 디지털피아노는 특성상 전자제품이므로 중고품의 가치는 현저히 떨어지는 편이다. 또 시장의 특성상, 부모님을 졸라 피아노를 마련했지만 금방 싫증을 내는 소년소녀들이 계시는 덕분에(^^;;), 운이 좋다면 실사용 1년 미만의 양품을 원가의 절반 이하의 금액으로도 구매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구한 피아노로 열심히, 중도 포기하지 않고 수년간 꾸준히 쳤다면, 향후 한 단계 더 높은 성장을 바라는 시기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그때 가서 좋은 모델을 선택하면 된다. 이때쯤이면 피아노를 수년간 연습해 오면서 스스로가 디지털피아노에 추구하는 음색이나 터치, 기능 등이 어떤 것인지 대략 파악하고 있기도 하고, 또 디지털피아노에 대한 지식도 꽤 가닥이 잡혀있을 것이므로, 위에서 말한 200만 원대~의 제품을 선택하더라도 더 이상 '함정'모델을 구입하거나 할 일도 없을 것이다.


덧붙여서, 이 시기에 구입하면 좋은 가장 추천하는 모델이 있다. 바로 맨 처음에 설명한 '하이엔드급 플래그쉽 모델'의 동일 라인상에 있는 한 단계 아래 제품이다. 대부분의 디지털피아노 메이커에서는 플래그쉽 모델을 내면서 기능적으로는 거의 동일하지만 몇몇 부수적인 요소를 뺀(스피커의 개수, 전문가를 위한/혹은 감성에 치중된 기능, 외관(도장) 등) 모델을 함께 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제품은 건반 터치 등의 핵심적인 요소는 플래그쉽 모델과 동일한 것을 채용하고 있으면서도 가격적으로는 100만 원 이상 저렴한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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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들이 실제 피아노를 접하지 못하고 디지털피아노로 연습하는 현실을 어떤 이들은 꽤 안타까워한다. 처음부터 디지털피아노로 배우면 터치며 듣는 귀며 모두 망쳐버리게 된다고. 나중에 진짜 피아노에서 치게 되었을 때, 이미 굳어버린 습관을 고치기 쉽지 않다고.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위와 같은 이야기에 고개가 갸우뚱해지기도 한다.


'나중에 진짜 피아노에서 치게 되었을 때'라뇨?


나중에?


나의 경우, 지난 2년 동안 피아노를 독학하면서 단 한 번도 진짜 피아노를 만져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학원에 다니거나 연습실을 빌리지 않는 이상 이러한 상태는 쭉 이어질 것이고, 업라이트 피아노는 고사하고 이른바 '실전'을 위한 그랜드 피아노를 만져볼 기회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즉, 내가 평생 가장 많이 연습하고 가장 많이 연주하게 될 악기는 '피아노'가 아니라 바로 '디지털피아노'일 것이라는 이야기. 게다가 난 딱히 누군가의 앞에서 연주하거나 콩쿨을 나가는 것이 목적인 것도 아닌 오로지 스스로의 만족을 목표로 하는 취미생이므로, 결국 내 평생의 '연습대'이자 '실전 필드'가 되어 늘상 마주할 악기는 디지털피아노일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이렇듯 메인 악기가 디지털 피아노가 될 사람이 애초부터 디지털피아노에 맞춘 '터치'혹은 '귀'를 갖게 된 들, 그것이 무슨 대단한 손해랄 게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면 지나치게 주제넘은 태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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