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우리는 어떤 색깔 땅에 살고 있을까?
매거진 <지구색물감>은 땅, 풀, 돌, 꽃 등의 천연 재료를 모아 지구색 물감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담긴 에세이입니다.
지난 1월 팬데믹을 뚫고 태국 여행을 다녀왔다. 한 달간 피피섬과 치앙마이, 방콕에 머물며 바다와 산, 햇빛과 동물들 사이에서 코로나19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
여행 중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그중 단연 최고의 경험은 천연 물감 만들기 워크숍이었다. 우연히 방콕 시내 Ware House 30 에 입점해있는 Woot Woot Store 에서 발견한 도트 팔레트로 그림을 그렸는데 유난히 발색이 좋았다. 제작자를 알고 싶은 마음에 검색해보니 Sand Suwanya 라는 아티스트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서 Sand를 찾아 DM을 보냈다. 클래스 문의를 하니 다행히 출국 바로 전날 여석이 있다고 했다. Sand의 스튜디오가 내가 머물고 있던 호텔에서 1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어 고민 없이 예약을 했다.
호숫가 근처에 위치한 Sand의 스튜디오는 마당이 딸린 이층짜리 주택이었다. 1층을 작업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까만 고양이와 다채로운 색들이 자연스러운 밸런스를 이루고 있어 무척 아름다웠다.
새소리가 들리는 고요한 스튜디오에서 열정어린 Sand의 목소리가 전해준 이야기는 지구색 물감을 더 좋아하게 만들었다. Sand는 인도에서 석사과정을 하던 중에 천연 물감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당시 Sand는 피부 알레르기가 심해져서 화학 물감을 쓸 수가 없었고, 유학생 신분이라 재료를 마음껏 구하기도 어려워서 자연에서 직접 안료를 얻고자 물감을 만들어 썼다. 여러 책과 재료 실험, 그리고 인도 여행 중 만난 한 노인에게 배운 노하우로 물감 제작 방법을 구체화했고, 석사 논문 주제로도 연결시켰다. 새소리가 들리는 고요한 스튜디오에서 열정어린 Sand의 목소리가 전해준 이야기는 지구색 물감을 더 좋아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돌을 빻고, 흙을 부수고, 화학실험을 하듯 안료를 불에 태우고, 산성 재료로 만든 안료에 재를 넣어 염기성으로 변환시키는 등 다양한 실험을 했다. 중간에는 마당에 나가 샌드위치도 먹고, 꽃과 풀, 열매 등을 따서 색을 칠하기도 했다. Sand가 그동안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채집해온 귀중한 흙과 돌도 구경하고, 안료를 만들 때 사용하는 뮬러, 명반, 아라빅 검 등의 재료들도 소개받으니 약속했던 5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Sand의 워크숍 덕분에 비로소 태국 여행이 완성된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코로나 19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예술교육가이자 시각예술가로서 어떻게 다음 작업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특히 Biophilia(생명사랑)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고 드로잉과 글쓰기를 조금씩 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알맞은 재료를 찾게 된 것이다!
언젠가부터 화학재료로 그림을 그리고 전시, 출판을 위해 인쇄를 하면서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하는 일들이 화학 물감이나 인쇄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시각매체를 만들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대안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흙, 풀, 꽃으로 만든 물감을 만드는 방법을 배운다는 건 선물 같은 일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조금씩 내가 사는 곳의 흙과 풀, 꽃과 돌들의 색들을 관찰하곤 했다. 그리고 내가 매일 먹고 마시는 땅의 색깔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작업을 하기 위해 새로운 습관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러닝을 하며 식물을 채집하기 시작했다. 2년 만에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위드 코로나의 첫 봄을 맞이해서 그런지 봄이 유난히 생생하게 느껴지고 산책과 러닝 중에 발견하는 풀과 꽃들이 가진 색감이 더 화사해 보였다. 풍요로운 천변을 뛰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나는 어떤 색깔 땅에 살고 있을까?, 내가 사는 땅의 색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모습일까?' <지구색물감> 시리즈는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짧게 적어내려가는 에세이로, 색깔을 탐색하며 만나는 관계와 지구색물감을 조색하며 느끼는 짧은 단상을 적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