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언어 예술 | 팬데믹 다이어리 5. 2022 겨울
[우정의 언어 예술 | 팬데믹 다이어리]는 2020년 코로나19로 팬데믹이 선포된 후 예술교육의 사회적 역할과 예술교육실천가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내용의 에세이입니다.
팬데믹에 떠난 태국여행
나는 올해 1월을 태국 여행으로 시작했다. 코로나19 이후 첫 해외여행이라 무척 기대되었지만, 걱정도 많이 됐다. 팬데믹으로 이전과는 달라졌을 여행 과정 중에 안전하게 지내다 올 수 있을지,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그 무엇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모험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여행은 출발하기 전부터 이전과는 달랐다. 태국 입국을 위해 백신 3차 접종을 하고, 코로나에 걸릴 가능성을 염두에 둔 비싼 여행자 보험 가입과 격리호텔까지 예약한 뒤에야 타이 패스(Thai Pass)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해외여행의 뉴노멀이라면 앞으로 해외여행은 매우 사치스러운 일이 되겠다고 생각하며 방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방콕에 도착한 뒤 하룻밤을 격리호텔에서 머물며 PCR 검사를 하고 푸껫으로 향했다. 푸껫섬 동남쪽의 라싸다 선착장(Rassada Pier)에서 스피드보트를 타고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피피섬은 인터넷에서 본 사진 그대로 아름다웠다. 파란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 습하지 않은 여름 날씨는 오랜만에 맞이한 휴가를 즐기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평소보다 관광객이 적은 섬은 매우 여유로웠다. 자연스레 사람들 간의 거리에도 여유가 생기자 긴장이 풀렸다. 이제야 여행이 시작된 것 같았다.
피피섬 고양이들의 뉴노멀
바닷가 야자나무 그늘에 느긋하게 앉아 망고를 먹고 있을 때였다. 빨간 카약 위에 앉아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고양이 한마리가 보였다. 귀여운 고양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사람이 무섭지 않은지, 나의 손길에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몸을 뒤집는 녀석의 온기가 좋았다. 그 후로도 며칠 간 리조트 곳곳에서 고양이들을 자주 만났다. 해변에서 모래찜질을 하는 고양이, 리조트 프런트 앞에서 낮잠 자는 고양이, 숙소에 매일 인사하러 오는 고양이 등...
태국은 원래 고양이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곳곳에 보이는 고양이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사흘째 저녁 식사후 리조트 한쪽 공터에 모여드는 고양이들을 보며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리조트의 직원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고양이들을 불러 모아 사료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서너 마리가 아니라 열 마리는 되어 보였다. 검은 고양이들이 한 줄로 서서 허겁지겁 밥을 먹는 모습을 보니 의아함이 증폭됐다.
다음 날 아침, 해변을 향하는 길에도 출근하며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리조트 직원들을 볼 수 있었다. 주의깊게 보니 상점마다 고양이가 한 두 마리씩 있었고, 종종 상점 골목 사이에서 영역 다툼을 하다가 생채기가 난 고양이가 도망가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 많은 고양이들은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걸까?
궁금증을 안고 구글 검색창에 “Koh Phi Phi Cats”를 입력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팬데믹으로 피피섬에 관광객 출입이 폐쇄되자, 관광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상인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피피섬에서 육지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함께 살던 고양이 일부는 안타깝게도 가족들과 생이별을 겪었다고 했다. 그 후 유기된 고양이들이 새끼를 낳아 개체수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났고, 어느새 피피섬은 고양이 섬이 되어버린 것이다. (기사)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섬 주민들이 고양이들을 돌봐주면서 그들과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자, 골목마다 호객하는 상인들과 고양이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반려와 공존의 감각
태국은 지난 2018년에 동물 유기 방지를 위해 동물 소유주에게 동물 등록을 신청을 의무화하고, 이를 행하지 않을 경우 벌금 25,000밧(약 86만 원)을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법안) 실효성에 대한 논란은 있겠지만, 원칙적으로 피피섬에서 일어난 고양이 유기 또한 법적으로는 주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마저 뒤흔든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반려동물과 어쩔 수 없이 이별을 감행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죄를 따져 묻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나는 이 딜레마 같은 상황을 헤아리며 ‘생명과 공존하는 감각’에 대해 계속해서 사유하게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만든 신조어 중에 팬데믹 퍼피(Pandemic Puppy)라는 용어가 있다.(기사) 전 세계에 2년이 넘도록 바이러스 확산세가 줄어들지 않으면서 재택근무가 잦아지고, 해외여행과 같이 장기 외출이 불가능해지자 반려동물 입양률이 높아졌다. 재난이나 위기가 닥쳤을 때 오히려 반려동물과 함께 이주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최근 러시아의 침공으로 집을 잃은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반려동물과 함께 입국할 수 있도록 동물 여권을 받지 않은 이탈리아, 폴란드, 슬로바키아 등이 그 예이다.(기사) 서로 의지하며 함께 고난을 견디는 반려동물과 그의 가족들은 반려와 공존의 감각이 어디까지 성숙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반면 사람의 일시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입양된 동물들이 안타깝게 파양 되면서 유기 동물 또한 늘어났다. 이러한 상반된 사례는 위기 속에서 반려동물과 공존하는 선택이 동물의 권리를 얼마나 이해하고, 생명 감수성이 얼마나 민감한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생애 처음 겪는 팬데믹은 나에게 외부세계와 공존하는 감각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생태계가 겪는 변화에 무지했던 나를 깨우친다. 코로나 초기에는 감염을 피하려고 격리를 선택했지만, 오히려 지금은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이나 정기적인 줌(Zoom) 모임을 가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리고 집 주변에 작은 텃밭을 만들어 채소를 길러 먹기도 하고, 유기된 강아지를 임시 보호하며 입양을 돕기도 했다. 집 안에서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꽃이 피고, 이파리가 하나 더 생기는 걸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주변에 생명의 기운을 느낄 기회가 많아지자, 양심을 따라 들을 수 있는 생명의 목소리가 생생해진다.
도시의 삶을 오래 살아온 나에게 그동안의 삶은 홀로 버티는 것이었는데, 팬데믹 이후로 오히려 기대어 사는 삶을 이해해가고 있다. 매일 작은 동물과 식물의 필요를 채우면서 사람됨을 느끼고, 한 뼘 뿐인 땅이지만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식물들로 내 몸이 먹고 산다는 순환의 감각을 배우게 된다.
피피섬에서 온 비밀편지
피피섬의 고양이들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팬데믹이 사람들의 일상을 바꿔놓았다는 것에 집중했다. 뉴스에서 기후위기로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동물이나 식물의 일상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외면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즐겨온 것들을 포기해야할 것 같아서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지도 않았다. 작가로 참여했던 그림책 프로젝트에서 산불을 끄기 위해 물방울을 실어 나르는 작디 작은 주인공 벌새의 마지막 대사를 이렇게 썼기 때문이다. (그림책)
‘내가 보잘것없고 나약하게 느껴졌지만 불길이 커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나는 모두에게 말했어요.
“나는 내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그만두면 안 돼.”
이건 그저 물 몇 방울일지 몰라요. 하지만 지구 곳곳에는 희망의 꽃을 매일 가꾸는 사람들이 있어요.’
도시에서 나고 자라 문명의 이기를 즐기며 살아온 내가 환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얼마나 부끄럽고 부담스러웠는지 모른다. 지키지 못할 약속들이 늘어만 가는 부채 의식이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자연의 목소리를 살짝 외면하면서 사람들의 어려움을 공감하는 방식으로 면피를 했던 것 같다. 그런데 휴식을 위해 찾은 피피섬에서 온 비밀편지는 무시할 수 없는 생명의 신호로 다가왔다. 게다가 ‘이제 시야를 넓혀 다양한 생물종과 공존하는 감각을 키워가는 지구인의 몫’을 요구한다. 이제까지 예술을 통해 맺어온 우정의 대상을 사람뿐만이 아니라 생태계 전반으로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양심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아갈 새로운 일상(뉴노멀, New Normal) 속에서 조금씩 다양한 생물종과 공존하며 존중하는 시각을 확장하는 시도를 해보려고한다. 일상의 소비와 먹거리, 작업할 때 사용하는 화학 재료들을 살펴보며, 에코 트렌드를 쫓아 유행처럼 끝날 일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보려 한다. 올해는 건강한 죄책감을 안고 피피섬에서 온 비밀 편지에 예술가로서, 예술교육실천가로서, 그리고 생활인으로서 어떻게 답장을 써야 할지 진지한 고민이 이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