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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Oct 13. 2016

이순신과 오다 노부나가 2

이순신과 오다 노부나가 2


앞의 글에서 이야기 한대로 임진왜란 때 조선은 일본에게 육전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  오랜 기간 전쟁 시대였던 일본에 비하여 오랜 태평성대를 누리던 조선은 실전에서의 감각도 큰 문제였지만 역시 가장 큰 요인은 그 당시 이미 고인이었지만 일본의 천재 오다 노부나가가 개발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술에 철저히 당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반면 조선이 큰 승리를 거둔 해전에서는 조선의 천재 이순신에 의해서 일본이 처참하게 당하고 만다.  

먼저 육전에서는 오랜 평화시대로 말미암아 조선의 육군이 실전 감각이 떨어졌지만 해전은 제법 많은 전투 경험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때문에 이런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즉 왜구들의 끊임없는 해적행위에 의한 노략질 때문에 조선 수군은 본의 아니게 실전 경험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왜구에 당하기만 했었는데 왜구의 전형적인 공격 방법인 접근 해서 배를 맞대고 넘어와서는 칼싸움을 하는 것에 많은 약점을 노출하였다.  이 당시 조선의 검술보다 일본의 검술이 더 우세하였던 것 같다. 이에 대비해서 조선은 명종 때 판옥선이라는 배를 건조하는 데 성공했다.  판옥선은 기존의 배에 지붕을 덮고 그 위에 한 층을 더 만들어 노를 젓는 공간과 전투하는 공간을 분리하였다.  따라서 이전같이 좁은 공간에서 우왕좌왕하는 일을 막고 더 많은 전투병력과 각종 무기들을 실을 수 있었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는 이 판옥선에 최대 약 200명의 병사들이 탑승해서 전투를 벌였다고 하는데 이 당시로는 정말 큰 전투함이었던 것이다.  또 배의 높이를 높임으로써 왜구들이 배로 쉽게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였고 보다 높은 곳에서 발사되는 포탄은 정확도가 더 높아졌다.  뒤에 탄생하는 거북선의 영향으로 판옥선은 후세에서 큰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 같은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판옥선이야 말로 적의 장점을 무기력화 하고 우리의 장점을 십분 살릴 수 있도록 고안된 자랑스러운 발명품이라 생각한다.  또 끊임없는 노력으로 포탄의 사거리를 점점 늘려서 임진왜란 때는 이미 일본 수군의 포탄 사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긴 사거리를 갖추게 되었다.  육전에서 맹위를 떨친 조총은 이러다 보니 해전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권투에 비유하자면 끊임없이 파고들면서 접근전에서 짧은 훅을 날리며 조선을 궁지에 몰아넣던 전형적인 인파이터 일본 수군을 조선 수군은 빠른 스텝과 긴 리치를 이용한 잽과 스트레이트 펀치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면서 침몰시키는 아웃복싱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이런 경쟁력 있는 하드웨어를 가지고 임진왜란을 맞이한 이순신 장군은 여기에 소프트웨어를 더하게 된다.  먼저 이런 전술에서 가장 필수적인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 젓는 군사들을 맹훈련을 시키는데 훈련의 강도가 어찌나 세었는지 탈영병들이 속출하였다고 한다.  이들을 잡아 예외 없이 참수하는 등 이순신 장군의 수군은 군기가 엄청 센 군대였고 우리가 덕장으로 생각하는 이순신 장군은 차라리 맹장 쪽에 가까운 지도자였다고 생각한다.  또 포탄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하여 일부러 물살이 센 바다에서 명중률을 높이는 훈련을 반복하였고 심하게 흔들리는 배위에서 뱃멀미를 하지 않도록 정말 단내 나는 훈련을 시켰다.


이런 노력은 보상을 받게 되는데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을 처음부터 격퇴시키게 된다.  일본 수군은 힘 한번 못 써보고 일방적으로 당하게 되는데 자기들의 포탄 사거리 훨씬 밖에서 명중률 높게 쏘아대는 조선 수군의 포탄에 속수무책이었다.  과거에는 작은 배들이 서로 교란하면서 접근해서 파고들었으나 이미 이순신 장군에 의해서 조련된 조선의 판옥선들은 놀라운 기동성과 속도로 이런 접근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육전과는 완전히 쌍방이 뒤바뀐 상황이 바다에서 재현된 것이다.


일본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오랜 전쟁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일본 장수들은 조선 수군의 이런 전략의 약점을 찾아내었는데 판옥선의 옆면에 설치된 포대에서 발사한 후 다시 포탄을 장전하고 불을 붙여서 재발사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따라서 조선 수군이 포를 발사하고 다시 장전해서 점화하는 시간 동안 접근해서 일본 수군의 포탄의 사거리 안으로 들어가면 조선 수군을 허물 수 있다는 계산을 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의 천재성이 여기서 드러나게 되는데 이런 일본의 전략을 미리 예상하고 여기에 대비한 전략을 수립하게 된다.  어찌 보면 조총이 가지고 있었던 약점과 같은 것인데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는 이미 말한 대로 3열로 정열 해서 순차적으로 발사하는 방법으로 이를 극복하였는데 바다 위의 큰 배에서는 이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판옥선 양 옆 모두에 포대를 설치해서 한쪽에서 포탄을 발사한 후 배를 순간적으로 180도 돌려서 반대편 옆면에서 이어서 포를 발사하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  물론 많은 참모들이 반대하였다.  최대 200명까지 탑승하고 있는 2층 배인 대형 판옥선이 그렇게 빠른 시간에 180도를 돌기는 불가능했다.  이순신 장군을 이를 또 엄청난 훈련으로 가능하게 만드는데 배가 돌기 위해서는 한쪽 면의 노만 저어야 하는 특성으로 볼 때 한쪽 면의 노에 모든 군사가 집결해서 젓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료에 의하면 판옥선이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노 젓는 아래층과 전투병이 있는 위층을 분리함으로써 공간 여유가 많아서 유사시에는 노 하나에 병사 5명이 같이 노를 젓는 것이 가능하였다고 하는데 아마 이때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즉 판옥선이라는 경쟁력 있는 하드웨어에 이순신 장군의 소프트웨어가 접목되면서 120% 그 성능이 발휘된 것이다.  결국 단발총인 조총을 연발 기관단총으로 변신시킨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에 있었다면 조선에는 기존의 대포를 지금의 다연발 포로 변모시킨 이순신이 있었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조선 수군은 거북선을 고안해 낸다.  사실 이렇게 거리를 유지하고 계속 밖에서 두드리는 것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게 된다.  아무리 거리를 유지해도 어느 시점에서는 거리를 허용하게 되는데 조선 입장에서도 접근해서 적을 부수는 돌격대도 필요하게 된다.   이를 위해 개발한 것이 거북선인데 내 생각에는 사실 판옥선을 만들 때 지붕을 씌우면서 그때 벌써 거북선의 아이디어는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즉 거북선이란 판옥선에서 2층 부분을 없애고 대신 1층 지붕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날카로운 쇠를 박아놓은 배다.  그러다 보니 전투병이 승선하지 않고 노 젓는 병사와 포를 발사하는 병사만 탑승한 이 거북선은 중앙에서 쏜살같이 포탄을 날리며 적진으로 돌진해서 적의 대장선이나 주요 기능을 담당하는 배와 충돌해서 적의 배를 침몰시키는 역할을 하였는데 적의 입장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거북선에 승선한 병사들도 이 충돌로 인한 충격으로 많은 부상을 당했을 텐데 이들의 이런 살신성인의 자세는 잊혀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해전에서 한 번의 패전도 없이 전승을 거두었는데 이로 인해 곧 조선 전체를 정복할 것 같았던 일본군의 계획에 엄청난 차질을 가져온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해안 봉쇄로 인해서 보급이 끊긴 일본 육군은 이로 인해서 재차 침입한 정유재란 때는 충청지역 인근에서 더 올라가지 못하고 주저하게 되며 전라도 지역에서는 오히려 조선과 명나라에게 포위되어 수성에 급급한 모습도 보여준다.


이로 인해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엄청난 타격을 받으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특히 육전보다 해전의 양상은 더욱 처참해서 해전에서 일방적으로 패한 일본군의 처참한 시신은 말년에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꿈에 자주 등장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으며 결국 해전에서 전사한 일본 수군의 비참한 몰골이 귀신이 되어 본인을 공격하는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정신병자가 되어 죽게 된다.

특히 야마오카 오이치의 대하소설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임진왜란 때의 일본 수군의 참상은 물론 육지에서 고립되어 끊긴 보급으로 아사 직전에 겨우 탈출하여 일본으로 돌아온 패잔병들의 비참한 몰골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패전한 일본 수군이 돌아온 날 장군들에게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숨긴다.  바로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였다.  그만큼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온 일본 수군 장군들도 조선과의 해전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지옥과도 같은 참혹한 패전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일전이었고 육전과 해전에서 서로 일방적인 승리와 또 일방적인 패배를 맛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결과에는 양국의 이순신과 오다 노부나가라는 두 천재가 있었다.

특히 조선 수군의 통쾌한 승리에는 이순신 장군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값진 조선 수군과 조정의 힘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라는 저서에서 모든 문명은 도전을 받기 마련이고 그 도전에 적절한 응전을 할 수 있었던 문명만이 더욱 성장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고대 로마제국부터 지금의 미국에 이르기까지 강대국들은 이런 과정에서 성공적인 대응으로 성장하였던 나라들이다.  당시 조선의 조정과 수군은 왜구의 침입에서 시작된 도전을 과학적이고 치밀한 응전으로 극복한 그래서 후에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해낸 선진 문명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영웅 만들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역사는 척박한 환경에서 오로지 이순신이라는 영웅 개인의 승리라고 말하나 내가 보기에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쾌거는 이순신이라는 천재와 조선 수군의 잘 짜인 시스템 덕분이었고 그래서 더욱 값진 승리가 아니었나 싶다.  우리 모두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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