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 차 엄마의 쌍둥이 육아 생존기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까. 하고싶은 말은 가득한데 말 못한 지가 오래되어 말 하는 법 마저 잊어버린 기분이다.
아기를 낳은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내 생활 및 가치관을 포함한 나를 구성했던 수 많은 요소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 생각하는 주제가 달라졌고, 걱정거리는 더 많아졌다. 미래 계획을 수정했고, 계획을 실행할 때 고려해야 하는 것도 바뀌었다.
출산은 마치 다시 태어나는 듯한 경험이었다. 좋은 의미도 있지만 그 뿐만은 아니다. 임신 기간 까지는 그럭저럭 유지했던 내 정체성과 내 존재 의미가 출산과 동시에 산산조각으로 분해된 뒤 재조립 되었다. 어쩌면 작년 겨울 분만실 수술대 위에서 태어난 건 두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데, 엄마로서의 나는 만들어질 시간도 없이 덜컥 세상에 태어난 미숙아와 같았다.
출산이 재탄생의 경험이었다면 육아는 태어나 처음 만난 재난이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단일 사건에 흠씬 두들겨 맞듯 시달려 본 적이 없었다. 교통사고로 인해 차에 치이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조리원 퇴소 직후 부터 쓰나미처럼 밀려 온 '돌봄 노동'의 강도에 나는 몇 달 동안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어떻게 지냈는지 모를 날들이 지나고 내 옆에는 지금 273일, 그러니까 딱 만 9개월이 된 아기가 자고 있다. 옆 방에는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둘째가 외할머니와 함께 자고 있을 것이다. 요 몇 달간 우리집은 저녁 8시부터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조그만 아기 두 명의 잠을 위해 어른 세 명과 고양이 두마리가 이 고요를 지켜주어야만 한다.
새삼스럽지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가 이만한 질량과 부피와 온도를 가진 생명을 하나도 아닌 둘 씩이나 만들어 냈다는 현실이. 색색 내 쉬는 저 애처로운 숨결들이 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9개월 쯤 되니 아기가 깊은 잠에 들어 숨소리가 얕아져도 코에 손을 대 보지 않게되었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등을 보면서 숨 잘 쉬고 있구나, 잠결에도 생각한다. 아기를 '살려 두는 것'이 최대 목표였던 신생아 시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그러나 여전히 저 숨들의 무게가 무겁다.
남아있는 기억이 모호한 9개월이다. 사진을 보아도 낯설다. 아기들의 더 어린 모습이 벌써 생각나지 않는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나의 뇌가 기억을 의도적으로 희미하게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어디로 가 버렸는 지 알 수가 없다. 결코 유쾌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는데,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더니 어느새 슬그머니 지나가 버렸다. 시간과 눈물이 지나간 곳에는 조금씩 더 커진 아기들이 남았다.
아기가 잘 때 자야만 하는데 베개 밑에 쑤셔넣어둔 작문 노트가 머리채를 잡아끄는듯 신경이 자꾸 그 곳으로 쏠린다. 나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쓰지 못한지가 9개월. 내 마음 속 거무칙칙한 응어리들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없어 매번 외면한 채 사소한 일로만 도망 다닌지도 9개월. 그러다 결국 언어가 되지 못한 스트레스들이 몸 속을 맴돌다 맴돌다 스스로 나를 비집고 나오기 시작할 때에야 나는 겨우 한 글자를 쓸 용기를 얻었다.
이것은 나에게 마치 재활훈련과도 같은 일이다. 출산과 동시에 2등 시민은 커녕 3등 시민이 되어버린 듯한 내 자아의 지위를 되찾기 위하여.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앞으로 앞으로 가고있는 것 같은 초조한 기분을 달래기 위하여.
물론 이 9개월은 끝이 아닐게다. 아니 오히려 이제 겨우 기나긴 양육의 길의 초입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더 뜨거운 지옥이 남아 있을 테지만 감히 이제까지의 힘겨움들을 이야기해 보고자, 더 잊어버리기 전에, 내 인생 최대의 고통과 기쁨이 공존했던 이 모순적이고도 혹독한 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육아가 나에게만 시련이었던 것은 아닐 터, 모든 육아동지들에게 조금이라도 공감과 위안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