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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Apr 10. 2020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21_이름 없는 고양이의 무사태평 인간만사, 흘러가는 세상만사

나쓰메 소세키, 그가 38세 작가로 데뷔한 등단작이자 출세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현암사)를 함께 읽었다. 하이쿠 전문잡지 호토토기스에서 단편으로 시작했으나 인기에 힘입어 장편 연재를 권유받아 1905년 1월부터 1906년 7월까지 총 11회로 연재됐다고 한다. 1904년에 터진 러일전쟁은 자국민조차 예상하지 못한 승리로 일본 전역이 도취되었고, 어딘가 모르게 고양된 분위기가 감지된다. 승전국이라는 자부심과 낙관주의, 자본과 권력을 좇는 물질만능이 만연했던 것 같다. 현암사에서 출간된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니 이 러일전쟁이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났던 것 같다. 대신 다른 그의 후기 소설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느낌이라면, 이 소설은 전쟁 승리라는 동시대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나쓰메 소세키는 1900년 일본 문부성 후원으로 영국 유학을 떠나 2년 간 서구 개인주의와 문화적 열등감과 동경, 비판 의식을 뼛속 깊이 흡수한 인물로서, "오늘날 보통 교양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소세키적 교양이라 칭하고, '소세키 문화'라는 의식에서 유래된 교양"이라는 부분에서 그의 파급력을 새삼 실감했다. 소세키 문화, 그의 초기 소설에서 드러난 박학다식과 정치, 경제, 신화, 역사, 철학의 폭넓은 독서는 시대상과 더불어 놀랍기만 하며 (이 소설에서도 다양한 동서양 철학자의 이름과 사상이 호명된다) 그는 실로 인텔리전트 한 엘리트의 전형이자 그의 표현에 따르면 하이칼라의 대표라 할 수 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고양이의 시선으로 감정을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의 인간사를 보여주기 위한 소설적 장치이자 동물의 시점을 통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인간과 그 세계에 대한 자연주의적 관찰을 시도한다. 고양이의 눈에 비친 인간 사회의 과장과 허풍, 허세, 선입견과 차별, 다양한 생태와 심리를 냉소적으로 응시하며, 자기 본위의 이기주의와 위선, 어리석음, 뻔뻔함을 풍자한다. 한편, 고양이 스스로도 자신이 고양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주인의 대화를 엿들으며 그 일원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낸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으나 고양이 나름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인간을 조롱한다. (손님이 앉아야 할 방석에 모른 척 올라가 앉는 장면이 떠오른다) 실제 미학자, 이학자, 시인, 철학자 등등 무사 태평한 나름의 지성인들이 이른바 '목요회'를 결성, 목요일마다 소세키 집에 모여 갖가지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이 소설 또한, 그 인물들을 모델 삼아 벌어진 담화와 일화를 바탕으로 했을 것이다. (심지어 소설 『갱부』의 모델이 되는 인물도 스쳐가듯 등장하여 단서가 충족된 기분, 『도련님의 시대』라는 만화를 보면, 소세키는 술버릇이 나빠 주사를 부리며 툭하면 지인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 재우곤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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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취향도 없고 구조도 없고 시작과 끝이 어설프기만 한 해삼 같은 문장이어서, 설사 이 한 권을 내고 사라진다고  한들 전혀 지장이 없다. 또한 실제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 고양이가 살아 있는 동안 - 고양이가 건강한 동안 - 고양이의 기분이 내킬 때는 - 나도 다시 붓을 잡아야 한다." (상편)

"아무리 고양이라도 일단 독에 빠져 극락왕생한 이상 그렇게 천박하게 부화할 수 없는 노릇이다. 페이지가 부족하다고 해서 호락호락 독에서 기어오르는 것은 고양이의 체면에 관계된 문제이니 이것만은 거절하기로 했다." (하편)


소세키가 직접 남긴 후기를 보면 상편과 하편의 느낌이 사뭇 다른데, 아마도 소설의 인기로 인한 작가의 환멸을 추측해본다. 대중의 관심과 인기가 한계점을 지나면 정작 작가는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쓸 수 없고 억지로 짜내야 하는 고역에 휩싸이지 않았을까. (그 반증으로 고양이를 독에 빠트려 죽인 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총 11장에서 1~5장은 상편, 6~9장은 중편, 10~11장은 하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하 편으로 갈수록 고양이의 등장 횟수나 비중이 줄어든다는 의견과 초반의 고양이를 통해 친밀감을 쌓은 뒤 정말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하편이 아니었을까라는 견해도 있었다. 반면 나는 하편으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져 독서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하편만 재독 했는데 그제야 대화의 주제를 파악했다. 역자의 후기처럼, 이 소설을 진지하게 읽지 말라는 당부는 그냥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잠시 힘을 빼고 키득거리며 여유 있게 상상하며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총 600페이지에 가까운 두께의 압박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나 역시 쫓기며 읽은 탓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고,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자 한다면 충분한 여유와 시간을 두고 읽기를 권한다.  



(16)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아무튼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데서 야옹야옹 울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족속을 봤다. (36) 이름은 아직도 지어주지 않았지만 욕심을 부리자면 한이 없는 일이니, 그런대로 만족하면서 평생 이 선생 집에서 이름 없는 고양이로 살아갈 생각이다.


1장의 첫 문장부터 강렬하게 사로잡혔다. 간결하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모두 산뜻하게 담겨 있다. 이름 없는 고양이, 고양이의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사와 거리를 두겠다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일까. 이름을 갖는 것조차 욕심을 부리는 거라는 1장 마지막 문장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상편(1~5장)은 고양이가 직접 자신을 소개하고 주인과 두서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고양이를 모델로 수채화를 그리려다 짜증을 내는 주인, 떡을 훔쳐 먹으려다 이빨에 끼어 본의 아니게 춤을 추는 수모를 겪는 고양이, 그게 창피하여 위로받으러 이웃집 고양이 얼룩이에게 가는 모습, 사람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는 얼룩이가 끝내 병으로 죽는 것, 그리고 인력거꾼 네 집 고양이 검둥이와의 대화, 간게쓰가 누군지 염탐하러 온 가네다 집안의 안주인 하나코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중편 (6~9장)은 메이테이의 실연 담이 나오는데, 좋아하는 여성이 알고 보니 뱀밥을 먹고 대머리가 된 걸 알고 나서 마음을 접었다는 이야기, "결혼이란 위험한 거야. 결혼 직전에 뜻밖의 허물이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니까. 간게쓰 군도 그렇게 동경하거나 멍한 채 혼자 전전긍긍하지만 말고 차분하게 유리알이나 가는 게 좋을 걸세" (p.301)  오늘날의 여성과 메이지 초기 여자의 품성을 비교하고, 고양이 운동법 세 가지, 소나무 미끄럼, 매미 잡기, 울타리 들기를 소개, 목욕탕에 나체로 들어가는 인간을 요괴라 표하며, 곰보인 주인이 시시때때로 거울을 보는 모습을 관찰한다. 하편(10~11장)은 어릴 적 바이올린을 어렵사리 구입하고 끝내 켜지 못한 일화를 듣는 이조차 지루할 정도로 길게 늘여 말한 간게쓰가 끝내 가네다 집안 딸, 도미코와 혼사를 파하고 아무 고향 여자와 결혼하며, 그 대신 산페이가 도미코와 결혼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 그리고 독에 빠진 고양이가 살기 위해 버둥거리기보다 고매하게 죽기를 결심하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더 다양한 일화들이 곳곳에 담겨 있으나 기억나는 것만 간략하게 남긴다)



(39) 특히 동정심이 결핍된 우리 주인 같은 사람은 서로를 속속들이 아는 것이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마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43) 원래 주인은 평소에 말라비틀어진 나무에 차디찬 바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나 실은 여성에게 결코 냉담한 편은 아니었다. (49) 세상에 냉소를 보내고 있는 건지, 세상에 섞이고 싶은 건지, 사소한 일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 건지, 세상사에 초연한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 주인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은, 일기라도 써서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어두운 방에서나마 발휘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461) 주인은 자신이 고집을 부릴수록 메이테이 선생보다 대단해진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이렇게 종잡을 수 없이 엉뚱한 일이 간혹 있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 이겼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 사람의 인간적 가치는 뚝 떨어지고 만다. 고집을 부린 당사자는 죽을 때까지 자기 체면만 세웠다고만 생각하고, 그때 이후 사람들이 경멸하며 상대해주지 않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행복을 돼지의 행복이라 부른다고 한다.



고양이의 주인인 구샤미 (재채기라는 뜻)는 중학교 영어 선생으로 자신을 교양인으로 생각하며 속세에 대한 혐오가 짙은 인물이다. (그가 사업가를 질색하는 반면, 대저택의 주인 가네다 일가는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구샤미를 고양이는 신랄하게 비꼬는데, 시대에 편승하지 못하고 대열에 낙오한 한량 취급을 한다. 그는 잠이 아주 많고, 안주인과 사소한 걸로 다투며 신경성 위염을 달고 살면서도 단 것을 떼지 못한다. 곰보라는 외모 콤플렉스가 심하며 읽지도 않을 책을 침실까지 가져와 읽다가 침 흘리며 자는 모습을 고양이는 한심하게 지켜본다. 그의 친구 메이테이는 미학자를 자처하며 구샤미에 비해 적극적이고 스스럼없이 친구 집을 드나든다. 서구 문화에 해박한 척하지만 대부분 근거가 없는 엉터리라는 것이 밝혀진다. 과장된 허풍과 잡담과 재담에 능하고 미술 원론을 백일홍이 질 때까지 완성하겠다고 호언장담해놓고 지키지 못한다. 그가 등장하면 일순 분위기가 코믹해진다. 간게쓰는 '목매달기의 역학'이라는 황당무계한 주제를 고민하는 엘리트. 도미코와의 혼인을 위해 박사 논문을 완성하기로 해놓고선, '개구리 안구의 전동 작용에 대한 자외선의 영향'이라는 논문을 쓰기 위해 10년 동안 유리알을 갈겠다고 한다. 이밖에도 여러 등장인물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등장했다 사라지고 치고 빠지며 한 편의 소동극을 연출한다.







소설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여성관에 대해, 결혼관에 대한 의견도 피력하는데 시대상에 맞춰 격상된 여성 입지에 대해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303)"'날개보다 가벼운 것은 먼지다. 먼지보다 가벼운 것은 바람이다. 바람보다 가벼운 것은 여자다. 여자보다 가벼운 것은 무다' 핵심을 찌르는 말 아닌가. 여자들은 정말 어쩔 수가 없다니까."

"여자가 가벼우면 안 된다고 말하지만 남자가 무거운 것도 좋은 일은 아니지요."


메이지 초기 여자의 품성과 20세기 오늘 날을 비교하는 대화에서 의구심이 들지 않을  없었는데, 메이지 초기 시대에는 어린 여자 아이를 바구니에 담아 채소 장수가 팔던 시대는 지났고, 지금은 그럴 필요 없이 독립심이 발달한 여자들이 학교나 합주회, 자선 모임에서 "  사주세요" 라며 "자신을 팔고 있다"라고 말한다. 메이지 초기는 여자 아이를 파는 행위가 어렵지 않았고, 그런 인신매매, 더 나아가 아동 학대에 대한 도덕심이나 경각심이 부족했던 시대였을까, 새삼 의문이 들었다. 또한, 여성이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자신을 팔고 있다'라고 표현한 것을 보니, 소위 교육받은 독립적인 여성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는지 느껴졌다. 심지어 아동 인신매매와 동일한 선에서 비교한 점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307) 요즘 여자들은 학교에 오가는 길이나 합주회, 자선 모임이나 원유회에서, 저 좀 사주세요, 어머, 싫으세요? 하고 자신을 팔고 있으니까, 그런 채소 장수 같은 사람을 고용해서, 여자아이 팝니다, 하고 천박한 위탁 판매를 할 필요가 없지요. 인간에게 독립심이 발달하게 된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법입니다.


한편, 구샤미는 서구 근대에서 건너온 평등과 자유사상에서 파생된 개인주의의 어두운 일면을 우려한다. 예술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에 대해서도 반색을 표하며,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동양의 '마음 수양'이라고 말한다.


(595) "두 사람이 길에서 만나면, 네가 인간이면 나도 인간이라며 마음속으로 싸움을 걸면서 지나치지. 그만큼 개인이 강해졌다는 거야. 개인이 평등하게 강해졌다는 것은 개인이 평등하게 약해졌다는 말이기도 해. 남이 나를 해치기 힘들어졌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내가 강해졌지만, 좀처럼 남에게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옛날보다 약해진 거겠지."

(598)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를 완전하게 하며,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과 아름다움입니다. 우리의 정서를 우아하게 하고, 품성을 고결하게 하며, 감정을 세련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둘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 어디서 태어난다고 해도 이 둘을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둘이 현실 세계에 나타나면, 사랑은 부부라는 관계가 되고, 아름다움은 시가와 음악이라는 형식으로 나뉩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지구 표면에 존재하는 한 부부와 예술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라지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지만, 지금 철학자가 말한 대로 분명히 사라지고 말 테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포기하는 거지. 뭐 예술이라고? 예술도 부부와 같은 운명으로 귀착될 걸게. 개성의 발달은 개성의 자유라는 뜻이겠지. 개성의 자유라는 의미는 나는 나, 남은 남이라는 의미일 테고, 그러니 예술 같은 게 존재할 리 없잖은가."

(601) "그러니 서양 문명 따위는 얼핏 좋아 보여도 실상은 틀려먹은 거야. 이에 비해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마음을 수양했지."



과연 어떻게 죽어야 할까. 마지막 장의 고양이처럼 술독에 빠져도 애를 써봐야 나갈 수 없다는 게 분명하다면 괜한 억지를 부리며 고통스러워할 바에 자연의 힘에 맡기고 저항하지 않는 편이 나은 것일까. 20세기 교양을 지닌 고양이의 선택이 그러하다.  


(587) "어차피 죽는다면 어떻게 죽는 게 좋을까. (...) 죽는 건 괴로워. 하지만 죽지 못하면 더 괴롭지. 신경쇠약에 걸린 국민은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훨씬 심한 고통이라네."

(617) 나는 죽는다. 죽어 이 태평함을 얻는다. 죽지 않으면 태평함을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고맙고도 고마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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